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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는 인간의 능력과 지혜의 허무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힘을 다해 세상만사를 연구해 보니 인생들이 하는 모든 일은 다 괴롭고 헛된 것이었다(13-14절). 인간의 힘은 그 한계가 너무도 분명했다(15절). 그는 자신의 지혜를 뽐내며(16절) 지혜와 우매에 대해 연구해 보았지만 그것도 헛된 것이었다(17절). 지혜가 많으면 번뇌가 많을 뿐이었다(18절). 인간의 노력은 헛되다. 왜냐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에 한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15절). 많은 이들이 지혜를 좋은 것으로 여기지만, 지혜를 추구하는 노력 또한 헛되다(17절). 지혜가 많으면 번뇌가 많고, 지식이 많으면 근심이 많을 뿐이기 때문이다(18절). 여기서 전도자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12절), 또 지혜로운 자로서(16절)..
오늘부터 전도서를 묵상한다.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1절)가 쓴 책으로, 이 묘사에 들어맞는 사람은 솔로몬 밖에 없다. 잘 알려진 대로 그가 누렸던 부와 권세, 지혜가 그의 삶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었는지 살펴보면서, 이 청년의 때에 삶의 방향을 다시 조정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2절) 전도서는 강렬한 구절로 시작된다. 우리가 하는 수고에 어떤 가치가 있는가(3절)? 해도 떴던 곳으로 돌아가고(5절), 바람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6절),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른다(7절).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9절).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다 과거에 있던 것들이다(9, 10절). 다만 기억되지 않을 뿐이다(11절). 우리는 ..
이제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 짓는다. 그는 디도를 니고볼리로 오라고 부르는 한편(12절) 율법교사 세나와 아볼로를 먼저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권면한다(13절). 그리고 바울은 이 맥락에서는 다소 생뚱맞게 "우리 사람들"을 잘 챙길 것을 권면한다(14절). 바울은 마지막으로 디도에게 문안 인사를 남기고, 축복으로 편지를 맺는다(15절). 다소 의아한 14절의 권면을 생각해 보자. 이 구절의 맥락은 사도인 바울과 그레데 교회의 지도자인 디도 사이의 교통이다. 바울은 디도에게 아데마 혹은 두기고를 보내고(12절), 디도는 세나와 아볼로를 바울에게 보낸 뒤 뒤따라 직접 바울에게로 갔다(13절). 이 상황에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우리 사람들"은 누구이며, "열매"와 "좋은 일"은 무엇일까? 13-14절의 개역개정 번..
지난 본문에서 복음의 요체를 설명한 바울은 디도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전할 것을 권하는 한편(8절), 무익한 논쟁(9절)과 이단(10-11절)은 피하라고 명한다. 즉,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집중해야 하는 가르침이 무엇인지, 그리고 버려야 하는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다. 첫째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말씀은 '복음'과 복음으로부터 기인하는 바울의 여러 가르침이다(8절). 바울이 이야기하는 "이 여러 것"(τούτων)은 2장부터 3장 전반에 이르는 가르침을 총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신중하고 경건하여 세상으로부터 비방을 받지 않게 살라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다. 다음으로 우리가 피해야 하는 가르침은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
지난 본문에서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를 언급한 바울은, 우리가 그들에 비해 나을 것이 없음을 논증한다. 우리 역시 죄인이었지만(3절)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얻었다(4-5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고(6절)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7절). 따라서 우리가 그들에게 우월감을 가질 것이 전혀 없다(딛 3:2). 오늘 본문은 다시 한 번 교만의 문제를 친다. 어쩌면 그레데 교인들은 자신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의롭다고 믿으며 그들을 비방하고 정죄했는지도 모르겠다. 바울은 그런 이들에게 우리도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음을 일깨워준다(3절). 하나님은 그런 우..
바울의 권면은 이어진다. 이번에는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는 순종하고(1절) 다른 이들과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2절). 아마 당시 그레데 교회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종종 다툼을 일으켰던 것이 아닐까 싶다. 특별히 이들은 자신들의 불평을 교회의 이름으로 정당화하지 않았을까. 바울은 그들에게 단호하게 말할 것을 주문한다. 바울의 권면은 조건부가 아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아무도" 비방하지 말고,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한다(2절).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2장에서 바울은 반복해서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연결된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설사 나의 유익과 배치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와 하나님을 생..
앞선 본문에서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딛 2:10)을 언급한 바울은, 이 교훈에 대해 부연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양육하사(11-12절), 이 세상에서의 삶과 오는 세상의 소망을 주셨다(12-13절). 예수께서 자신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14절). 바울은 디도에게 다시 한 번 이 교훈을 전하라고 명한다(15절). 바울이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올바른 삶의 태도'인 듯 하다. 바울은 이를 두 가지 근거로 뒷받침한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하신 방식(11-12절)이고,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14절)이다. 그리고 바울은 목회자인 디도에게 권위를 가지고 이를 엄히 가르치라고 명한다(15절). 바울의 근거를 하나씩 살펴보자. 바울은 율법주의자..
오늘 본문은 종들을 향한 권고이다. 바울은 두 가지를 권면한다. 상전을 거스르지 말고 기쁘게 할 것(9절)과 신실하게 일하는 것(10절)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동일한 것을 제시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하기 위함이다(10절). 노예제가 폐지된 현대 사회에서 이 본문은 사회에 존재하는 위계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보다 사회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대할 때, 그의 권위 아래 있는 부분에 있어서는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않는 것이 옳다(9절). 일하는 자세 역시 "모든 참된 신실성"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10절). 바울은 노예제를 뒤집어 엎으라고 명하는 대신, 그 권위에 순종하여 복음 전파에 기여하라고 권한다. 이는 디모데전서의 입장과 같..
이번 본문에서 바울은 젊은 남자들에 대한 권면을 준다. 지난 본문과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신중함"이 포인트이다(6절). 그리고 디도는 그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7-8절). 그러면 그 결과 대적들이 더 이상 교회를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8절). 지난 본문과 마찬가지로, 당시 교회 내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경솔하게 행동해서 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았던 배경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8절). 바울은 이런 상황을 경계하며 젊은 남자들이 가져야 하는 덕목으로 "신중함"을 꼽는다(6절).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울은 여기서 그들에게 말로 가르치라고 하는 대신 디도가 모범을 보이라고 이야기한다(7절). 이는 디도 자신이 교회의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젊은 남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바울은 그가 "범사에" 모범이 되어야..
오늘 본문은 젊은 여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를 가르친다. 바울은 젊은 여자들을 가정에 제한된 존재로 보고 있다. 여자의 의무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4절) "집안 일"(οὐκουρός)을 하는 것(5절)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울은 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5절). 과연 이 본문을 현대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본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모든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고 집안에만 쳐박혀 있으라고 해야 할까? 나는 이 본문을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편지가 쓰여진 1세기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남녀의 역할 차이가 확연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벗어나는 자들에 대해 사회적인 인식이 좋지 않았다. 본문에서 이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여자가 남..
디도에게 거짓 교사들을 대적할 것을 권면한 사도 바울은 이제 교회 성도들을 대하는 법을 이른다. 목회자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에 서 있는 것이다(1절). 이로써 교회의 나이든 남녀들이 여생을 거룩하게 보낼 수 있도록 권면하여야 한다(2-3절). 앞의 본문과 이후의 본문을 잇는 중요한 구절이 1절이다. 사도 바울은 "오직"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라고 명령한다(1절). 거짓 교사들이 횡행하는 당시 그레데 교회의 상황에서, 바울이 세운 목회자였던 디도가 지켜야 하는 것은 "바른 교훈"이었던 것이다. 이 바른 교훈은 성도들의 삶을 계도하는 데 사용되었다(cf. 딛 2:15). 오늘 본문을 통해 당시 나이든 남녀가 빠지기 쉬웠던 함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나이든 남자들은 아마 세속적인 모습으로 생각 없..
앞선 본문에서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언급한 바울(딛 1:9)은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부연한다. 그들은 할례파 중에 많이 있고(10절),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잘못된 가르침을 베풀어 가정들을 무너뜨린다(11절).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르지만 행위로 하나님을 저버린 자들이다(15-16절). 바울은 디도에게 그레데인들을 엄히 꾸짖어(13절) 올바른 가르침을 따르게 하라고 권면한다(14절). 오늘 본문은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할례파"(10절)나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한다(16절)는 표현으로 보건대 이들은 율법주의자들이었던 것 같다. 이들은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가르쳤는데(14절), 15절로 보건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율법대로 엄격히 구분하여..
오늘 본문은 바울이 디도에게 장로(5-6절)와 감독(7-9절)의 기준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장로(πρεσβύτερος)와 감독(ἐπίσκοπος)이 어떻게 다른지가 조금 불명확한데,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해(행 20:17) 그들을 "감독"이라 부르는 것(행 20:28)을 보면 별개의 직분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용어의 구분은 확실히 있었던 것 같고, 디모데전서의 용례로부터 "장로"는 교회의 나이든 중진들을 가리키는 말(딤전 5:17-20), "감독"은 집사와 더불어 교회 조직을 관리하는 직분(딤전 3:1-7)으로 보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cf. 빌 1:1). 바울은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 두어 각 도시마다 장로들을 세우고자 했다..
새해부터는 날샘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진도를 정해서 큐티를 하고자 한다. 성경을 흐름에 따라서 읽는 것이 좋은데, 큐티 책을 따라가다 보면 긴 기간 빠질 때 아무래도 해당 본문들을 건너 뛰게 되기 때문이다. 어젯밤에 미국에 돌아왔고, 오늘부터 다시 일상이다. 디도서로 새해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본문은 편지의 서두 부분이다. 바울은 스스로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사도직을 설명하고(1-3절), 수신인인 디도를 축복한다(4절). 바울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소개한다(1절). 헬라어 원문과 NIV 번역을 참고해서 본문을 읽어 보면, 바울의 사도직은 "영생의 소망"(2절) 안에 있는 "믿음"과 "지식"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1절). 영생은 하나님이 약속하셨다가(2절) 때가 되어..
모르드개가 시키는 대로 왕의 조서가 작성되어 빠른 시일 안에 전국에 반포된다(9-10, 14절). 그 내용은 유다인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11-13절). 모르드개는 존귀한 자리에 올랐고(15절), 각 지방의 유다인들도 영광을 누렸다(16-17절). 오늘 본문은 모르드개와 유다인이 누리는 영광에 대해 기술한다. 9-14절에는 반복적으로 "왕"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 제도와 신민을 주관하는 자는 아하수에로가 아니라 모르드개이다(9절). 이는 모르드개가 존귀한 복장으로 영광을 받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15절). 모르드개가 통치자로서 영광을 받을 때, 유다인들 역시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을 누린다(16절). 이들은 "대적에게 원수를 갚"을 권세를 가지고 있었고(13절..
하만을 처형한 아하수에로는 그 집을 에스더에게 주고(1절) 반지를 모르드개에게 준다(2절). 또한 유다인을 진멸하라는 포고를 철회해달라는 에스더의 청(3-6절)에, 왕의 조서는 철회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조서를 내리겠다는 약속을 한다(7-8절). 세상 권세는 무너지고, 그 권력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넘어 온다. "유다인을 살해하려" 한 하만은 나무에 매달렸고(7절), 모르드개는 하만의 권세와 재산을 그대로 물려 받는다(2절). 세상 권세가 꾸며놓은 계략은 이제 다른 조서로 인해 무효화되고(8절), 하나님의 백성이 당해야 했던 화(6절)는 이제 복으로 변한다. 이제부터 시작될 에스더 후반부는 완전 멸망 직전까지 갔던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회복되는 역사를 그린다. 이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
아하수에로와 하만은 에스더가 베푼 두 번째 잔치에 참석한다(1절). 왕이 다시 한 번 소원을 묻자(2절), 에스더는 이제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민족을 왕에게 구한다(3-4절). 그게 누구인지 묻는 왕에게(5절) 에스더가 하만을 지목하자(6절) 하만은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한다(7-8절). 하지만 왕의 분노는 하만을 나무에 달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9-10절). 드디어 하만의 최후가 등장했다.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 속에서 에스더의 기지가 빛을 발한다. 에스더는 자신과 유다 민족의 멸망을 단순히 개인적인 비극으로 묘사하는 대신, 왕의 제국에 손해가 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4절). 그 결과 아하수에로는 에스더의 슬픔을 제국의 손해로 연결시켜 분노할 수 있었고(5절), 결국 하만을 제거하기에 이른다(10절). 본..
아하수에로는 우연히 역대 일기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모르드개가 고발했음을 읽고(1-2절) 이에 대한 포상이 안 되었음을 발견한다(3절). 그는 하만을 불러(4-5절) 포상 방법을 논의한다(6-9절). 자신이 그 수혜자일 것이라 생각했던 하만은 모르드개에게 포상이 내려지자(10-11절) 굴욕적으로 집으로 돌아왔고(12-13절), 이내 에스더의 잔치로 나아갔다. 본문은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는 허락을 받으러 궁전 뜰에 나아갔지만(4절), 정작 그가 한 것은 모르드개를 영광스럽게 만든 것이었다(11절). 하만은 자신을 높이려고 하였지만(6-9절), 정작 그가 높인 것은 모르드개였다(10-11절). 이는 사람의 계획과 의도가 꼭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모든 역..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결단을 촉구하고(4:12-14), 에스더는 3일 금식 후 규례를 어기고 왕 앞에 나아가겠다고 약속한 후(4:15-17) 그 말대로 왕에게 나아간다(5:1). 왕은 에스더를 사랑스럽게 보아 무슨 청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5:2-3). 에스더는 왕과 하만을 잔치에 초대하였고(5:4-5),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소원을 묻는 왕에게(5:6) 다음 날 잔치에서 알리겠다고 답한다(5:7-8). 하만은 이 특별한 초청에 고무되어(5:10-12) 기고만장하여 모르드개를 죽일 계략을 세운다(5:9, 13-14). 에스더의 행동은 "규례를 어기"는 것이었다(4:16). 그리고 에스더가 행동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은 어떻게든 유다인을 구원하셨을 것이다(4:14). 하지만 에스더는 쓰임 받는 쪽을 ..
왕의 조서가 반포되자 각 지방에서 유다인들이 애통하며 부르짖기 시작했다(3절). 모르드개 역시 슬픔을 표시하며 대궐 문 앞까지 이른다(1-2절). 그 소식을 들은 에스더가 자초지종을 묻자(4-5절) 모르드개는 진상을 밝히고 왕에게 민족을 위해 구하라고 권한다(6-8절). 에스더는 그 일이 쉽지 않음을 알린다(9-11절). 고난을 겪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본문은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누"웠다고 증언한다(3절). 금식하는 것, 베옷을 입는 것, 재에 눕는 것은 모두 육체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하나님 앞에서 슬픔을 표현함으로써 하나님께 자신의 뜻을 전달하려는 것이다(cf. 사 58:3-5). 모르드개는 거기에 더하여 왕후 에스더에게 청을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