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사랑 (82)
Lovos credit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이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신다(12절). 이는 하나님이 자비하시고 인애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13절). 그는 그 백성이 통회하며 돌아올 때 그 백성을 내치지 않으실 것이다(14절). 요엘은 이어 이스라엘에게 선포한다. 금식을 선포하고 백성을 모아(15-16절) 함께 하나님 앞에 자복하라(17절).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응답하실 것이다(18절). 지난 본문까지 무시무시한 심판이 이루어질 "여호와의 날"을 예언한 요엘은, 오늘 본문부터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 해결책은, 어찌 보면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돌아오라! 본문은 반복법으로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한다(12절). 그리고 온 백..
십자가형 선고를 받은 예수(눅 23:25)는 사형장으로 끌려간다. 그를 끌고 가던 자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지게 했다(26절). 많은 이들이 슬퍼하며 예수를 따랐고(27절),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해 임박한 환난을 이야기하시며 자신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신다(28-31절). 마침내 해골이라는 곳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33절), 양 옆에 사형 선고를 받은 두 행악자도 동일하게 못 박혔다(32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을 위하여 청원하는 기도를 올리셨다(34절). 그들은 그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눠가졌고(34절), 백성은 서서 구경했으며(35절), 관리들은 예수를 비웃었다(35절). 군인들 역시 예수를 희롱하며 신 포도주를 주었다(36-38절). 옆에 달린..
예수께서는 여리고에 들어오셨다(1절). 사람들이 예수를 보기 위하여 많이 몰려왔고(3절) 그 중에 세리장인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다(2절). 그는 자신의 작은 키로 인해 예수가 보이지 않자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4절).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그 집에 유하겠다고 그를 부르셨다(5절). 삭개오는 즐거워하며 영접하였다(6절). 사람들은 수군거렸지만(7절) 삭개오는 자신이 회개하였음을 보였고(8절) 예수께서는 그 또한 구원받았다고 선언하셨다(9-10절). 오늘 본문은 정말 전형적이다! 사람들은 "죄인"을 꺼리고 불편해 하지만, 예수께서는 바로 그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절) 하지만 오늘 나는 이 본문을 열심히 뜯어 보며 연구하기보다, 본..
예수께서 안식일에 어느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다(1절). 그 자리에 "수종병", 즉 부종에 걸린 사람이 있었고(2절)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야 하는지를 물으셨다(3절). 그들이 답을 못 하자 예수께서는 그를 고쳐 보내시고(4절) 그들이 안식일에라도 자녀나 가축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는 일을 한다는 점을 지적하셨다(5절). 역시 그들은 유구무언이었다(6절). 이 이야기는 13장의 치유 이야기(눅 13:10-17)와 많이 겹친다. 예수께서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치유 행위를 많이 하신 것으로 보인다. 13장 본문에서는 자유롭게 하는 것을 두고 말씀하셨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구하는 것을 가지고 말씀하신다. 즉 자녀나 가축이 우물에 빠졌다면 안식일이라고 하더라도 끌..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께 질문을 드린다. 누가는 그 이유를 예수를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25절). 그의 질문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느냐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에 기록된 바를 되물으셨고(26절), 율법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되어 있다고 답한다(27절). 예수께서는 그렇게 행하면 살 수 있다고 답하신다(28절).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영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누가복음에는 이 "영생"이라는 단어가 단 두 번 등장하는데, 오늘 본문과 눅 18:18-30이 그것이다. 두 본문 모두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흔히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동일시하는데, 최소한 누가복음은 그렇게 보고 있지 않은 듯 하다. (특히 눅 18장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시몬이라는 바리새인(40절)의 초대를 받고 그의 집에 방문하셨다(36절). 그 때 그 동네의 "죄인"인 여자가 예수께 나아와(37절) 그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닦으며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38절). 아마 그는 몸을 파는 여자였거나 간음하여 공동체에서 축출된 여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따라서 시몬은 속으로 예수가 죄인인 여자를 분간하지 못한다며 비웃었다(39절). 그 순간 예수께서는 500 데나리온과 50 데나리온을 빚진 자들이(41절) 그 빚을 모두 탕감 받았다면 누가 더 빚 준 자를 사랑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지셨다(40-42절). 시몬은 많이 탕감 받은 자라는 맞는 답을 내놓았다(43절). 이제 그 비유는 현실로 대응된다. 시몬은 50 데나리온 빚진 자요, 여인은 500 데나리..
예수의 평지 설교 두 번째 부분이다. 지난 본문에서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자들과 핍박 받는 자들에게 상급을 약속하신 주님은, 그 "제자들"(눅 6:20)이 따라야 하는 쉽지 않은 제자도를 가르치신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27-28절) 이 부분은 네 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고, '나'와 '그'의 대조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가 나에게 행하는 악한 행위를 그대로 선한 행위로 돌려주라! 29-30절 역시 네 개의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다.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라]..
오늘부터 말라기를 묵상한다. 말라기는 기록 연대와 저자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책으로, 선지자의 이름인 말라기(מַלְאָכִי)조차 '내 사자'라는 뜻을 담고 있어 고유 명사인지가 불분명하다. (말 3:1에서는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를 "내 사자"로 번역하고 있다.) 대개 말라기는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난 이후, 어쩌면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시대보다도 더 훗날에 기록된 책으로 보지만, 나는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을 상정하지 않고 본문을 묵상해 나갈까 한다. 하나님은 말라기, 혹은 어떤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경고"를 주신다(1절). 이 "경고"라는 히브리어 단어(מַשָּׂ֥א)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사용되는데(사 13:1, 합 1:1, 슥 12:1 등), 그 이후 따라오는 글에서 특별히 미래에 있을..
보아스는 성문으로 올라가서 엘리멜렉의 가장 가까운 친족을 만난다(1절). 보아스는 그를 불러 앉히고(1절) 성읍 장로 열 명도 청하여 앉힌다(2절). 이는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기 위함이었다(cf. 룻 4:9-11). 그리고 보아스는 말을 꺼낸다. "나오미가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고자 하는데(3절) 당신이 그것을 사겠는가? 당신이 사지 않는다면 내가 사겠다(4절)." 이는 아마 레 25장에 나오는 율법 규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이 가난하여 토지를 잃었다면 그 가까운 친족이 그것을 다시 사서 돌려줘야 한다는 규정이다. 흥미롭게도 그 사람은 "내가 무르리라"라고 흔쾌히 답한다(4절). 그러자 보아스는 그 밭을 사기 위해서는 말론의 아내 룻도 취해서 말론을 대신하여 후사를 남겨야 한다는 점을 상..
밤에 보리를 타작하던(룻 3:2) 보아스는 먹고 마신 후 즐거운 마음으로 구석에 누웠다(7절). 그것을 본 룻은 조용히 가서 발켠에 누웠다(7절). 보아스가 자다가 놀라 깨보니 여인이 발치에 있었다(8절). 보아스는 누구냐고 물었고 룻은 자신을 밝힌다(9절). 여기서 보아스가 소리를 지르거나 법석을 떨지 않은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마 그랬다면 룻은 크게 경을 쳤을 것이다(cf. 룻 3:14). 룻은 보아스에게 "옷자락을 펴" 자신을 덮어 달라고 말한다(9절). 이는 문자적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동시에 상징적인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즉, 룻은 보아스에게 남편이 되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표현이 룻 2:12의 '하나님의 날개'를 연상시킨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보아스..
시어머니를 붙들고 떠나지 않는 룻에게, 나오미는 동서 오르바처럼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한다(15절). 그러자 룻은 그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끝까지 나오미를 따르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청한다(16-17절). 이 부분에서 흥미로운 문학적 장치가 눈에 띈다. 나오미는 오르바가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 돌아갔다고 말하는데(15절), 룻은 그 말을 받아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16절). 그리고 바로 이어 "여호와"를 언급함으로(17절) 그가 여호와 신앙에 들어왔음을 표현한다. 나오미는 룻의 굳은 결심을 보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18절). 그들은 함께 원래 엘리멜렉이 살던 고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는데(22절), 그러자 베들레헴 사람들..
지난 본문까지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면 응당 형제자매를 사랑해야 한다는 권면을 썼다. 이제 요한은 이어 사랑은 심판 날의 "담대함"을 준다는 근거를 제시한다(17절). 앞서 요일 2:28과 3:21에서도 요한은 동일한 표현(παρρησίαν)을 썼는데, 특히 2:28의 경우에는 맥락도 비슷하다. 오늘 본문은 이제 이 말을 부연한다. 우리가 주님처럼 담대할 수 있는 것(17절)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18절). 즉 참된 사랑을 안 사람이라면 더이상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심판 날"에도 담대할 수 있다. 요한은 이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재차 던진다(19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하자는 명령을 다시 준다(7절).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만(7절)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8절).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드러났는가? 본문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 사랑이 드러났다고 증언한다(9-10절).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여 그 아들을 희생시키셨다(10절)! 따라서 이 사랑을 받아 아는 자라면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마땅하다(11절). 다시 사랑을 독려하기 위해 사도 요한은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이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된다고 권면한다(12절).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성령을 받은 것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을 실천하자고 권면한 사도 요한(요일 3:18)은 그 이유를 이야기한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진리에 속했음이 드러나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굳세게 된다(19절). 즉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됨이 증명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20절은 해석이 다소 쉽지 않은데, 내 생각에는 21절과 이어서 볼 때 설사 죄책감이 들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깨끗함을 얻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듯 하다. 다시 말해, 만약 무언가 죄를 범하여 그로 인한 찔림이 있을지라도,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됨이 증명된 사람이라면 담대하게 그 백성답게 행동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cf. 히 4:16). 하나님의 백성은 그 앞에서 담대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되고(21절) 무엇이든 구하는 바를 받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선언한다(14절). 따라서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직 사망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14절), 심지어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것과 같다(15절). 살인자 안에서 영생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14절은 다소 해석이 필요한데, 요한일서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cf. 요일 5:13). 도리어 이 구절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자가 나타낼 모습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 하다.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는 자연스레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인용하여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을 아는 자라면 마찬가지로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게 된다고까지 말한다(16절). 이는 요 15..
사도 요한은 미혹 당하지 말라고 말하며 새로운 권면을 시작한다(7절). 무슨 미혹을 말하는지가 다소 불분명한데, 다음 구절들을 통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의를 행하는 자는 예수처럼 의롭고(7절) 죄를 짓는 자는 "처음부터 범죄"한 마귀에게 속한다(8절). 요한은 변형해서 반복하는 문학 기법을 즐겨 쓰는데, 다시 한 번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인다(9절). 따라서 행실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난다(10절). 의를 행하지 않는 자,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마귀의 자녀요(10절),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11절). 그리고 가인의 예(창 4:1-15)를 들어 마귀에게 속한 자를 보여준다(12절). 가인의 행위는 악하고 아벨의 행위는 의로웠..
계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요한 사도는 여기서 갑자기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하나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세상"은 요한일서에서 처음 나오는 것인데(cf. 요일 2:2),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7절부터 묵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7절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는 앞선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계명 준수와 맞닿아 있는 표현으로, 요한은 그와 대조하여 "이 세상", "그 정욕"을 제시한다(17절). 이제 15-16절로 눈을 돌려 보자.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다(15절). 그 이유는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6절). 즉,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도 요한은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 그리고 "아이들"에게 각각 말을 전한다. 12절에 사용된 "자녀들"이라는 단어(τεκνία)는 이미 2장 1절에서 사용한 단어로, 그 후에도 2:28; 3:7, 18; 4:4; 5:21에서 사용된다. 이로부터 볼 때, 물리적으로 어린 사람들을 가리킨다기보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즉, 요한은 수신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기에 이러한 내용을 전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반면 13절에 나오는 "아비들"(πατέρες)과 "청년들"(νεανίσκοι)은 정확히 이 본문과 14절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들이다. 요한은 아비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청년들은 악한 자를 이..
사도 요한은 독자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그리스도의 계명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이 계명은 새 계명이 아니면서(7절) 새 계명이다(8절). 이 아이러니컬한 표현을 통해 요한은 계명의 두 가지 측면을 환기한다. 먼저, 이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 즉 율법에 담긴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다(7절). 반면 이 계명은 "참빛"이 비칠 때 주어진 계명이기도 하다(8절). 이를 풀어 설명하면 이렇다. 요한에게 있어 이 계명은 이미 율법 안에 내포되어 있는 계명이었다. 따라서 율법을 아는 독자들이라면 이 계명에 대해서도 잘 알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계명이 율법과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계명은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8절)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
오늘부터 요한일서를 묵상한다. 요한은 생명의 말씀을 직접 경험했다고 말한다(1절). 그리고 그는 그 드러난 생명을 보고 증언하여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했다고 말한다(2절). 이는 결국 그들이 함께 성부, 성자와 사귐을 누리기 위함이었고(3절), 요한은 이를 씀으로써 자신의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한다(4절). 요한일서의 서두는 다른 서신서들의 서두와 사뭇 다르다. 보통 발신인과 수신인을 밝혀 쓰는데(cf. 요이 1, 요삼 1), 요한일서는 그런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서신이 어디로 보내졌는지는 알 수 없고, 발신인이 요한이라는 것도 내적 증거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요한복음, 요한이서와 메시지가 유사한 부분이 있고, 교회의 전승에서 본 서신서의 저작권을 요한에게 돌리고 있으므로 나 역시 그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