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묵상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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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에 식사를 하러 학교 근처 식당가에 나갔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거리를 걷고 있는데, 문득 앞을 보니 어느 흑인 분이 휠체어에 앉은 채 길 한가운데 버티고 있다. 눈을 안 마주치고 재빨리 곁을 지나쳐 가려는데 그 분이 말을 거신다. "Excuse me." 못 들은 척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Excuse me, sir? Sir!" 그 분의 목소리가 내 뒤로 점점 멀어진다. 마음은 복잡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했다. 바쁜 하루를 보내며 그 일을 잊은 채, 저녁에는 습관대로 수요예배에 나와 앉았다. 찬양을 부르며 "지금 이 자리에서 주가 영광 받으시도록" 가사에 울컥했다. 예배 후 개인 기도 시간에 그 가사를 묵상하며 입을 열었다. "하나님,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해요." ..
요즘 교회 공동체에서 내 마음을 괴롭게 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을 조작해서 모든 걸 자기 뜻대로 이루려 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짜증내고 험담하는 사람이다. 그간 사이가 꽤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지난 주일에 마침내 이 사람이 내 자존심을 긁어 버렸다. 순간 내가 얼굴이 굳었고, 파하는 순간까지 그 사람을 피해 다녔다. 때마침 다음 주일에 자리를 비우는 관계로 시간을 두고 마음을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또 이 사람과 부딪칠 일이 생겼다. 다음 주에 이 도시를 떠나는 친구가 있어서 교역자님과 같이 셋이서 밥을 먹기로 했는데, 문제의 그 사람이 눈치도 없이 끼겠다고 한 것이다. 카톡 방에 초대되었길래 지켜보고 있는데, 떠나는 친구에게 먹고 싶은 걸 고르라더니 정작 고르니까 자신이 원..
오늘 수요 예배 마치고 기도하던 중에 문득 깨달은 것 하나. 주님께서는 반역자의 죄목으로 재판을 당하셨는데, 사실 그 자리는 내가 서있어야 하는 자리였다. 내가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했고, 스스로 왕이라 참칭했으며, 내 삶의 왕인양 거들먹거리며 살아 왔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에 따르자면 내가 그 자리에서 채찍에 맞고, 가시관을 쓰며, "네가 왕이냐?"라는 조롱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가 대신 채찍에 맞으셨고, 그가 대신 가시관을 쓰셨으며, 그가 대신 조롱을 당하셨다. 아무 이유 없이, 그가 대신 다 당하셨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 아니겠는가.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
나는 때때로 노인들, 그리고 좀더 의식이 있어야 할 그리스도인 노인들까지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는다. "아무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내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았으면 행복하겠어요. 짐이 되느니 죽는 게 낫죠." 하지만 이런 태도는 옳지 않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짐이 되도록 설계되었다. 당신은 내게 짐이 되도록 설계되었고 나는 당신에게 짐이 되도록 설계되었다. 가족의 삶, 그리고 지역 교회 가족의 삶 역시 '서로에게 짐이 되는' 삶이어야 한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의존의 위엄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분은 전적으로 엄마의 보살핌에 의존해야 하는 아기로 태어나셨다. 누군가 그분을 먹이고, 엉덩이를 닦아 주고, ..
어젯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이, 사도 바울이 우리 교회에 와서 직접 설교를 한다면, 과연 나는 무슨 반응을 보일 것인가? "아이 참, 저 양반은 무슨 얘기를 저렇게 어렵게 해? 저렇게 얘기해서 사람들이 이해하겠어?"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0, 66) "어째 저리 말이 비리비리하냐. 설교자가 복음에 확신이 없나?"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고후 10:10, 12) 나의 귀..
이 애 이 애 걱정 마라 나도 같이 쓸어주마 나 위해 쓸자는 그 방 내가 쓸어 너를 주고 닦다가 닳아질 네 맘 내 닦아주마 쓸지 닦지 하던 마음 그것조차 맘뿐이고 님이 손수 쓸으시고 나까지도 앉으라시니 내 자랑이라곤 없소이다 참 없소이다 함석헌 선생의 시 의 일부. 김기석 목사님의 를 읽고 있다. 책장을 넘기다 위 시를 마주하게 되었다. 쿵,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귀하디 귀한 님을 맞이하려고 쓸고 닦고 하지만, 채비를 채 차리기도 전에 님이 오셨다. 준비 안 된 어수선한 광경을 보시며 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친히 비를 드신다. 난 곁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님은 청소를 마치시고,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시며 내게 앉으라고 권하신다. 부끄럽다. ..
나는 예전부터 그런 기도를 하곤 했다. "내 생명을 취하시더라도 여자친구가 구원 받는다면 드리겠습니다." 얼핏 보면 대단한 신앙의 고백이요, 순교자의 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그러한 나 자신을 뿌듯하게 여겼고, '왜 이런 기도를 하는데도 주님은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걸까?'라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오늘 대학부 예배 중에 을 부르게 되었다. 찬양하는 중에 갑자기 주님이 이렇게 물으시는 것 같았다. "얘야, 네 생명은 됐고, 네가 매일 두 시간씩 떼어서 기도할 때 그걸로 여자친구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네 시간을 나에게 줄 수 있겠니?" 머뭇거려졌다. '내가 그냥 칵 죽어버린다면 그건 드릴 수 있겠는데, 삶을 살면서 그 일부를 드리는 건...' 주님의 물음은 이어졌다. "만약 네가 그렇게 애지..
와 를 읽으면서, 그리고 선지서들을 읽으면서 많은 수의 선지자들을 본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해보자. "이들은 누구와 싸웠는가?" 우리는 엘리야나 요나와 같이 "유명한" 선지자들의 이야기만 잘 알고 있어서, 당연히 이방인들과 싸웠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유다를 향해 경고와 저주를 퍼부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크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다. 첫번째는 우상숭배요, 두번째는 사회적 불의였다. 여기서 우상숭배란, 대부분의 경우 전적으로 이방 종교에 의탁하는 것을 말한다기보다 일종의 "혼합주의"로 우상을 숭배했던 것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자칭하면서, 동시에 풍요를 얻..
어제는 추수감사절이었다. 대예배에서 기도를 하는데, 문득 나는 왜 이렇게 힘든 건지 왜 이렇게 무능한 건지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확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 고생 없이 편하게 신앙생활하고, 어떤 사람들은 고생은 좀 해도 신비한 체험을 하며 주님을 만나는데, 나는 왜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저 고생만 하고 있는 걸까 싶더라. 그런데 그 순간 마음에 떠오른 말씀이 있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이 말씀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내가 절망적인 죄인일 때에 나를 위해 죽으셨고(롬 5:8),..
우리 교회에는 예배 중에 통성으로 회개하는 시간이 있다. 어제 그 시간에 기도를 하다가 한 단어가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INCORRIGIBLE 단어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교정(矯正)할 수 없는, 구제[선도]할 수 없는 2 다루기 힘든, 제멋대로 구는 3 고쳐지지 않는, 뿌리깊은 고집불통. 구제불능. 잘못한 것을 깨닫고도 다시 돌아가 죄를 범하는 나의 모습이 정말 이 단어에 정확히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11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잠 26:11)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지난 주에 목사님께서 요한복음 1장을 강해하시면서 제자들이 자신의 친구들을 '전도'한 말은 그저 "와서 보라.(Come, and you will see.)"였다는 말씀을 하셨다. 복잡한 논증을 늘어놓거나 자신의 체험담을 열정적으로 떠드는 대신,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해보라고 권했다는 것이다. 순간 깨달았다. 우리는 '전도'를 자꾸 '설득'으로 생각한다. "기독교는 XXX해서 옳아. 그러니까 믿어." "내가 믿어보니까 XXX가 좋더라. 그러니까 믿어." 그런데 성경에 나타나는 전도는 그런 게 아니었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봐. 그럼 알게 될 거야." 이것이 우리의 올바른 전도 방식 아닐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 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