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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이스보셋의 마지막을 그리고 있다. 그는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력해졌다(1절). 이 때 바아나와 레갑(2-3절)이라는 군지휘관들이 이스보셋을 암살하고(5-7절) 그의 머리를 베어 다윗에게 바친다(8절). 다윗은 이들을 칭찬하기는커녕 이들을 엄히 꾸짖고(9-11절) 사형에 처한다(12절). (4절에 나오는 뜬금 없는 므비보셋 이야기는 삼하 9장의 이야기를 위한 복선이다.) 날샘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들을 꾸짖는 다윗의 말에 주목한다. 그는 므비보셋을 "의인"으로, 레갑과 바아나를 "악인"으로 부르며 그들이 "피 흘린 죄"를 엄히 다룬다(11절). 그렇다면 어째서 레갑과 바아나는 악인일까? 정말 날샘이 이야기하듯 "암살"은 "비겁한" 행동이기 때문에 악한 것일까? 아니면 조조가 군주를 죽..
오늘 본문에서 특이하게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두 개 있다. 바로 "왕"과 "백성"이다. 모든 절에서 두 단어 중 하나는 반드시 등장한다. 이 단어들을 강조하여 본문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왕"은 "백성"에게 슬퍼할 것을 명하였고(31절) "왕"이 무덤 앞에서 울자 "백성"도 다 울었다(32절). "왕"이 애가를 지어 부르니(33절) "백성"이 슬퍼하여 울었다(34절). "백성"은 "왕"의 옥체를 염려하였고 "왕"은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금식을 맹세한다(35절). 이를 본 "백성"은 기뻐하며(36절) "왕"을 신뢰한다(37절). 무엇이 보이는가? 바람직한 왕과 백성의 관계가 보이지 않는가? 31-34절에서는 왕을 따르는 백성의 모습이, 35-37절에서는 왕을 사랑하며 신뢰하는 백성의 모습이 나타..
본문은 요압이 없는 사이에 다윗이 아브넬의 투항을 받아들여 그를 평안히 보낸 것(22절)을 알고 요압이 분노하여(23-25절) 아브넬을 쫓아가(26절) 결국 그를 속여 죽인 이야기(27절)를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요압이 동생 아사헬의 원수를 갚은 것이라고 설명한다(27, 30절; cf. 삼하 2:18-23). 흥미로운 것은 이에 대한 다윗의 반응이다. 우선 다윗은 아브넬의 항변(23-25절)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아브넬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 알지 못했다(26절). 알게 된 이후, 다윗은 아브넬의 피에 대해 무죄하다고 선언하며(28절) 요압을 저주한다(29절). 이는 "악행"이었기 때문이다(삼하 3:39). 이 사건은 다윗에게 깊이 각인되어, 그가 죽기 직전 솔로몬에게 내린 유언에서도 ..
구원사적 관점에서 볼 때 다윗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불완전한) 예표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브넬의 발언 속에서 이 점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구원"하여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다윗을 택하셨다(18절). 본문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은 그 다윗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했던 것으로 묘사되고(17절), 또한 이스라엘 백성 역시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선하게 여겼던 것으로 나타난다(19절). 처음에 이스보셋을 따랐던 자들(삼하 2:8-9)이 왜 마음을 바꾸었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이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어쩌면 애초에 이스보셋을 따랐던 것이 아브넬의 강압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본문이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부분에 지나..
본문은 이후의 내용을 요약하는 서론으로 시작된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간다"는 문장이 그것이다(1절). 다윗의 부강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자식을 주셨음에서도 드러난다(2-5절). 헤브론에서 왕으로 있던 7년 반 동안(삼하 2:11) 그는 여섯 명의 아들을 보았다. 딸까지 있었다면 더 많은 자식을 본 셈이다. 다윗이 강대해지는 동안 사울의 집에서는 아브넬이 권세를 잡았다(6절). 7절부터 11절에서는 이 아브넬과 이스보셋 간의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고 있다. 이스보셋은 아브넬에게 계모와 통간한 것을 지적한다(7절). 하지만 (날샘의 바람과는 달리)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브넬이 이를 "매우 분하게 여긴" 것(8절)으로 볼 때 어쩌면 누명이었는..
다윗 군대가 이스보셋 군대를 물리친 후(17절), 이스보셋 군대는 패주하다가 전열을 가다듬어 작은 산에 멈춰섰다(25절). 이 자리에서 이스보셋 군대의 사령관인 아브넬은 다윗 군대의 사령관인 요압에게 더 이상 추격하지 말라고 청한다(26절). 이는 형제 간에 "참혹한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이 다음 구절(27절)이 흥미로운데, 날샘(및 개역개정)에서는 이 구절에서 이야기하는 "네가 말한 것"을 삼하 2:14와 연관지어 전투를 시작하게 만든 아브넬의 제안으로 해석한다. 그러면서 서로 잘못해서 의미 없는 싸움이 지속되었다는 매우 건전한 ^^ 결론을 유도해낸다. 하지만 나는 NIV와 같이 "네가 말한 것"은 바로 앞 구절에 나오는 아브넬의 휴전 제안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이 절에서 사용된 ..
오늘도 날샘의 묵상 방향에 반대하는 글을 쓰게 될 것 같다. (박희원 목사님 용서하소서...) 날샘은 아사헬의 죽음을 "고집불통의 결과"로 보고 있으나, 본문이 정말 그걸 이야기하고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우선 본문을 살펴보자면, 아사헬은 발이 빠른 사람으로 긍정적으로 묘사되고(18절),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여 아브넬을 쫓은 것으로 나타난다(19절). 아사헬이 물러가기를 거절한 것(23절)은 사실 적장을 쫓는 군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이 '괜한 고집'인가? 내 생각에 이 아사헬의 죽음은 삼하 3:27에서 묘사되는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복선일 뿐이다. (얼마나 묵상할 포인트가 없었으면 날샘에서 이런 포인트를 잡았는지 모르겠다;;;) 본문의 주제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보다 다윗의 백성과 이..
본문은 다윗과 이스보셋이 각각 헤브론과 마하나임에서 왕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다윗은 유다 족속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고(4절a), 이스보셋은 그 밖의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9절). 흥미로운 점 하나는 나중에 남유다 왕국에 속하게 되는 베냐민 지파가 여기서는 이스보셋 편에 붙었다는 점인데, 이는 사울이 베냐민 지파 출신인 것(삼상 9:1-2)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짐작할 때 다윗이 유다 족속의 왕이 된 것도 유다 족속 출신(삼상 17:12)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왕이 되기 전까지 다윗은 어떠한 존재였는가? 인간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그는 이스라엘 왕의 미움을 받는 "패거리"의 두목일 뿐이었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신임..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만들어(17절) 자기 치하의 백성들("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명한다(18절). 이 노래에서는 반복적으로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라는 표현이 사용되면서(19절, 25절, 27절) 큰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다윗은 그들이 전사한 길보아 산들을 저주할 정도로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21절). 이 노래에서도 여전히 사울과 요나단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인용되며(19절), 그들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의 즐거움이 된다(20절). 시의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다윗은 그들을 칭송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용맹스러운 자들이었으며(22절, 23b절),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들이었다(23a절). 사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이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한 이유(12절)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패하여 죽었기 때문이었다(12절). 본문은 흥미롭게도 사울과 요나단을 여호와의 백성 및 이스라엘 족속과 병치함으로써 사울 역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또한 본문에서 사울은 악인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14, 16절)"로 나타난다. 다윗이 아말렉 청년을 죽인 것 역시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자를 죽였(다고 증언했)기 때문이었다. 실지로 사울은 스스로의 죽음을 자초했지만, 본문에서 사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죽은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비록 자신의 "주적"이었더라도, 비록 의롭게 살지 않는 왕이었더라도,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날샘은 아말렉 청년의 거짓말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본문이 정말 그 거짓말을 강조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특히 "보상"을 바랐다는 이야기는 그 흔적도 보이지 않는데 심리학을 쓰는 게 아닌가 싶고.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무엇보다 다윗이 그를 죽인 이유는 그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본문이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왔다는 기사(1절)로 시작하는 걸로 볼 때, 그리고 반복해서 그 청년이 "아말렉 사람"임을 강조하는 것(8절, cf. 13절)으로 볼 때, "아말렉 사람"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이 좀 더 맞지 않을까. 본문에서 "아말렉 사람"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를 거리낌 없이 죽이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10절, cf. 14절). 이는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세상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