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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자(15절), 다윗의 친구 후새가 압살롬을 반기며 나온다(16절). 압살롬이 의아해하자(17절) 후새는 이제부터 압살롬을 섬기겠다고 답한다(18-19절). 한편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라는 계략을 제시하였고(20-21절), 압살롬은 그대로 행하였다(22절). 본문에서 나는 두 가지 지혜를 본다. 한 가지는 아히도벨로 대표되는 사람의 지혜이다. 그는 가장 효과적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규합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21절). 아히도벨이 얼마나 뛰어난 모사였는지, 그의 말은 하나님의 계시와 같은 권위를 지니고 있을 정도였다(23절).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은 아히도벨이 백성을 규합하기 위해 사용한 모략조차 사용하사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그..
다윗 왕은 도망가던 중에 시므이를 만난다(5절). 시므이는 다윗 일행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주하였는데(6, 13절), 이는 다윗이 사울 왕가를 멸망시켰기 때문이었다(8절). 아비새가 그를 죽이려 하자(9절) 다윗이 저지한다(10-12절). 그들은 시므이를 지나 한 곳에 이르러 쉬었다(14절). 본문에서도 나의 의지와 하나님의 섭리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은 일단 시므이의 저주를 "여호와의 명령"으로 받아들인다(10, 11절). 여기까지만 보면 운명론과 다를 바 없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뜻이고 나의 뜻과 생각은 다 부질 없는 것. 하지만 다윗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원통함을 감찰하실 수도 있다며(12절)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인다. 이..
다윗은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슬픔에 잠겨 예루살렘을 떠난다(30절). 아히도벨이 역도 중의 하나라는 것을 들은 다윗(31절)은 자신의 친구 후새(37절)를 예루살렘에 남겨두어 아히도벨의 모략을 무력화시키려 한다(32-34절). 또한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통해 압살롬의 동태를 살피고자 한다(35-36절). 한편 압살롬은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한다(37절). 본문에서 받은 첫인상은 "슬픔"이었다. 다윗과 백성들은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감람산으로 올라갔다(30절). 후새는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쓰고" 다윗에게 나왔다(32절). 왕자가 왕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왕은 하나님의 궤를 버려둔 채 광야로 도망치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누가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들의 고통을 더한 ..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다윗은 과감히 포기한다. 어쩌면 법궤의 존재로 인해 압살롬이 정당성을 확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25-26절)으로 법궤를 포기한다. 다윗의 말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가 심금을 울린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했던 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와 쌍벽을 이루는 신앙의 언어 아닌가. 나는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되돌아 본다.
다윗과 잇대의 대화는 나오미와 룻의 대화를 연상시킨다. 다윗의 말(20절)처럼 잇대는 "은혜와 진리"가 있는 곳을 따라나섰다. 하지만 그곳은 호화로운 궁전이 아니라 "광야 길"(23절)이었다. 나는 은혜와 진리를 따라 광야로 향할 결심을 했는가?
압살롬이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게 해달라고 허락을 구하자(7-8절) 다윗은 이를 흔쾌히 허락한다(9절). 하지만 압살롬은 사람들을 이끌고 헤브론으로 가(11절) 왕을 칭하고(10절), 민심이 점차 압살롬에게로 기운다(12절). 압살롬이 왜 반역의 장소로 헤브론을 택했을까? 헤브론은 다윗이 왕이 되어 7년 반을 다스린 곳(삼하 2:11)이었다. 이 때 이스라엘의 대부분은 사울 왕가의 수중에 있었고, 다윗은 유다 지파만 다스리고 있었다. 어쩌면 압살롬은 이를 기억하고 동일한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하려 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윗과 압살롬에게는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다윗이 헤브론으로 간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삼하 2:1). 압살롬은 비록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핑계를 대기는..
압살롬은 사병 조직을 꾸린다(1절). 또한 그는 아침마다 예루살렘 성문 곁에 서서 송사하러 온 사람들(2절)에게 다윗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고(3절) 자신이 정의를 베풀겠다고 선언한다(4절). 게다가 따뜻하게 그들에게 입을 맞추어(5절) 마음을 훔치게 된다(6절). 본문은 이제 확연하게 압살롬을 악인으로 보기 시작했다("훔치니라", 6절). 압살롬은 "자기를 위하여" 사병 조직을 키우고(1절) 왕에 대한 불신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신뢰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심어준다(6절). 나는 다시 한 번 구원사적 시각으로 본문을 해석해 보려 한다. 다윗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즉, 하나님께서 주권을 내려주신 이 땅의 통치자인 것이다. 압살롬은 그런 통치자의 정의를 의심하게 한다. "보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
본문은 압살롬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한다. 압살롬은 외모가 출중한 사람으로(25절), 특히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26절). 그는 세 아들과 더불어, 자기 여동생과 같은 이름의 아름다운 딸을 두고 있었다(27절). 이 소개는 훗날 압살롬의 죽음(삼하 18:9-15)을 설명하기 위한 복선이다. 이어 압살롬과 다윗의 화해 장면이 나온다. 압살롬은 2년 동안 왕을 보지 못하여(28절) 요압을 통해 말을 전하려 하나 요압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29절). 이에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고(30절) 성난 요압이 찾아오자(31절) 자신의 요구를 말한다(32절). 결국 압살롬과 다윗은 재회할 수 있었다(33절). 날샘의 묵상과는 달리, 나는 본문이 압살롬을 악인으로 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차라리 내 눈에 더 띄는 것..
다윗은 드고아 여인에게 배후에 요압이 있었는지 묻고(18-19a), 여인은 그랬다고 실토한다(19b-20절). 다윗은 요압에게 명하여 압살롬을 데려오게 하고(21절), 요압은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려온다(23절).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을 만나 주지 않는다(24절). 본문에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요압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는 이유"이다. 사무엘하 14장에서 다윗은 그저 무기력한 변덕쟁이 왕인 것처럼 그려지고 있고, 요압은 그를 설득하여 행동을 취하게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다윗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어쩌면 사무엘서 기자는 이를 통해 요압이 다윗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음을 기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다윗이 그를 경계하고 있었음에도(왕상 2:5) 섣..
여인은 다윗에게로부터 원하던 답을 얻자마자(삼하 14:11) 자신이 진짜 말하려고 하던 메시지를 전한다(12절). 그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다윗의 판결을 압살롬에게 대입시키며(13-14절), 자신이 다윗에게 나온 이유가 다윗의 판결을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15-17절). 어렵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성경이 드고아 여인의 발언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제는 성급하게 드고아 여인을 인간의 지혜를 좇아 율법을 어기게 하는 존재로 간주했지만, 오늘 본문을 꼼꼼히 뜯어보니 그렇게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불러온 것이 악한 일이었는가? 아니면 압살롬을 온전히 용서하지 않은 것이 악한 일이었는가? 전자가 맞다면 요압과 드고아 여인은 비난 받아야 할 테지만, 후자..
요압은 다윗의 마음을 읽고(1절) 지혜로운 여인을 하나 구해 다윗에게 보낸다(2-3절). 다윗에게 간 그(4절)는 자신을 과부로 소개하고(5절) 두 아들이 싸우다 한 아들이 죽었다고 말한다(6절). 이어 살인자 아들을 죽이려는 사람들을(7절) 말려달라고 청원하고(11절), 다윗은 그를 돕겠다고 세 번 답한다(8절, 10절, 11절). 본문은 "왜 다윗은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도로 불러왔는가?"(삼하 14:23)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다윗은 압살롬을 그리워했다(1절, cf. 삼하 13:39). 하지만 한편으로 압살롬을 선뜻 불러올 수는 없었다. 이는 암논을 잃은 슬픔(삼하 13:37)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왕으로서 살인자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을 수..
다윗은 모든 왕자가 다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30절) 옷을 찢고 땅에 드러누웠다(31절). 요나답은 암논만 죽었을 것이라며 다윗을 위로한다(32-33절). 곧 왕자들이 돌아왔고(34-35절) 함께 통곡한다(36절). 압살롬은 그술로 도망가서 3년을 지냈고(37-38절), 다윗은 압살롬을 향한 마음이 간절해졌다(39절). 나는 어제에 이어 오늘 본문에서도 죄악의 귀결을 본다. 가깝게는 암논의 죄에서 기인하지만 멀리는 다윗의 죄로까지 소급되는 이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죄의 파괴성을 다시 한 번 절감할 수 있다. 본문에는 슬픔과 고통을 표현하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 다윗은 소문을 듣고 "옷을 찢고 땅에 드러"누웠고(31절), 왕자들과 재회한 후에는 "심히 통곡"했다(36절). "아들"이 누구를 가리키..
압살롬이 드디어 자신의 복수극을 실행에 옮긴다. 그는 양털 깎는 행사(23절)에 다윗(24절)과 형제들을 초대하나(23절), 다윗은 고사한다(25절). 압살롬은 대신 암논을 보내 달라고 청하고(26절), 이에 못 이긴 다윗은 허락한다(27절). 압살롬은 종들을 시켜 암논을 살해하고, 다른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친다(28-29절). 오늘 본문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구절은 압살롬이 종들에게 명령한 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기를 내라"(28절)라는 말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구절 아닌가? 비교해 보자.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수 1:9) 하나님이 당신의 "종" 여호수아(수 24:29)에게 명하신 말을..
암논은 억지로 다말과 동침한 후 다말의 반항(16절)에도 불구하고 그를 쫓아내 버린다(15-18a절). 다말은 크게 울부짖으며(18b-19절) 압살롬의 집에 가서 거하고(20절), 이야기를 전해들은 압살롬은 암논에 대한 앙심을 품는다(22절). 이야기를 전해들은 다윗 역시 크게 노한다(21절). 날샘은 다윗의 직무 유기를 크게 강조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본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인지 의심스럽다. 사무엘서가 압살롬의 반역을 나단 선지자의 예언(삼하 12:11-12)이 성취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삼하 16:21-22)을 감안해 볼 때, 다윗이 이 사건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취했는지가 과연 중요할까? 나는 어쩌면 다윗은 무언가 반응을 했지만 사무엘서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 "심히 노하니라"..
다윗은 암논의 청을 받아들여 다말에게 암논을 방문하라 명한다(7절). 다말이 암논을 찾아가 과자를 만들고(8절) 먹으라 하나(9절), 암논은 다말에게 먹여달라 하고(10절) 그 틈을 타 다말을 범하려 한다(11절). 다말의 완강한 저항(12-13절)에도 불구하고 결국 암논은 뜻을 이룬다(14절). 본문에서는 암논의 치밀함이 잘 드러난다. 암논은 다말과 단 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고(9절), 다말을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여(10절) 강간하기에 어려움이 없는 환경을 꾸민다. 그의 뻔뻔함은 다말을 "나의 누이"라고 부르는 데서 드러난다(11절). 그는 다말을 여동생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그에게 동침하자고 청한 것이었다. 이는 다말의 말대로 "어리석은 일"이었지만(12절), 그는 "듣지 아니하고" 결국 죄를 범..
본문은 전쟁 이후 벌어진 내전의 시초를 기술하고 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사랑하여(1절) 상사병이 났다(2절). 암논의 친구 요나답(3절)은 그에게 병이 난 이유를 묻고(4절), 계략을 짜서 그에게 알려준다(5절). 암논은 그 계략을 실행에 옮긴다(6절). 먼저 다윗의 자녀들이 서로 어떠한 관계인지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대상 3:1-9에 따르면 다윗의 장자는 본문에 나오는 암논이었다. 압살롬은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고, 오늘 본문에 따르면 다말은 그의 여동생이었다. 암논이 다윗의 맏아들이라는 점은 특히 흥미로운데,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이 계모를 범하여(창 35:22) 저주를 받은 것(창 49:3-4)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계모를 범한 르우벤은 결국 장자권을 박탈당하였고, 이복누이..
본문은 이스라엘과 암몬 자손 사이의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 설명하고 있다. 요압은 랍바 왕성을 점령한 후(26절) 다윗에게 전갈을 보내 전쟁을 끝내길 요청한다(27-28절). 다윗은 랍바를 쳐서 점령한 후(29절) 물건들을 노략하고 백성들을 노예로 삼았다(30-31절). 이번 본문을 이해하는 단초는 어느 흐름을 타느냐일 것이다. 이 본문은 다윗의 범죄 기사에서 이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삼하 10장에서 이어지는 것인가? 날샘은 위치상 범죄 기사에 이어지기 때문에 이 본문이 대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나는 "만약 처음부터 다윗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에 집중했더라면"과 같은 가정법 문장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본문에서는 그러한 가정법을 암시조차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
다윗은 아이의 죽음을 듣고 몸을 추스려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온다(20절). 의아한 신하들이 묻자(21절), 긍휼을 구할 때는 금식하고 울었지만 이미 아이가 죽은 후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답한다(22-23절). 이후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다시 아들 솔로몬을 얻었고,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였다(24-25절). 다윗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실지 몰라서(22절)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알면서 나아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고, 다윗은 이에 대해 실망하거나 원망하는 모습 대신, 정갈하게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는 모습(20절)을 보인다. 다윗의 기도가 놀라운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지만,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
본문은 나단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다윗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다윗은 먼저 회개하였고(13a절), 나단은 그 죄가 사하여졌지만 아이는 죽을 것이라고 전한다(13b-14절).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자(15절) 다윗은 간절히 그 아이를 위하여 기도한다(16-17절). 하지만 그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죽었고(18절), 다윗도 그 사실을 알게 된다(19절). 먼저 내 시선을 끌었던 것은 다윗의 회개 모습이었다. 본문에서는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한 문장으로 회개를 마치고 하나님이 그 회개를 받으신 것처럼 나오지만, 시 51편에 보면 사실 그 안에 좀 더 깊고 구체적인 회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회개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도 죄를 사하셨던 것이다. 또한 다윗이 아이를 위하여..
본문에서 나단은 다윗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베푸신 은혜를 상기시키시고(7-8절), 그 은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을 책망하신다(9-10절). 이 불순종의 결과는 심판이었다(10-12절).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순종의 죄악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9절)이었고, 이는 곧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었다(10절). 왜 그러한가?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며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행동이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우습게 아는 것이다. 본문에 기록된 다윗의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