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큐티 (1131)
Lovos credit
본문은 "그 후에"라는 단어로 시작되어(28절) 역시 지난 본문과 연결되어 있음을 표현한다. 그 후는 언제인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눈물 섞인 간구(욜 2:12-17)를 들으시고 그 백성을 회복시키신 때(욜 2:18-27)이다. 백성이 회복된 이후,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주신다(28-29절). 최후 심판의 날이 임하기 전, 이적이 일어날 것이고(30-31절) 이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32절). 이 본문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본문이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신 것을 두고 사도 베드로가 해석의 열쇠로 삼은 본문이기 때문이다(행 2:17-21). 베드로는 본문의 "내 영"을 행 2장에서 임한 성령으로 보는데, 따라서 오늘 본문에 따르면 그 전에 백성의..
본문은 "그때"(18절)에 일어날 놀라운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때는 어떤 때인가? 지난 본문을 참조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이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돌아올 때이다(욜 2:12).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적군을 쫓아내시고(20절) 황폐한 땅이 다시 생산력을 회복하여(22-23절) 풍성한 식량을 제공하도록 하실 것(19, 24-26절)이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표현은 반복해서 등장하는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라는 구절(26, 27절; 19절 참조)이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기도 "이방의 조롱거리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욜 2:17)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이 무력하다는 조롱 앞에서 하나님께 애통하며 울부짖는 기도, 하나님은 이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우리가 "마음을 찢고"(13절) "울며"(12, 17절) 해야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긍휼을 구하는 기도다(17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방의 조롱거리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 역시 이래야 한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조롱 당하는 이 시대에 이로 인하여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12절) 하나님께 매달리는 자는 어디 있는가?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11절)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심판하실 그 날은 크고 심히 두려운 날이다. 그 분노를, 그 적의를, 하나님은 골고다 언덕 위에 매달린 자신의 아들에게 쏟아 부으셨다. 다시 십자가 앞에 나아가 그 말도 안 되는 사랑에 감읍하는 내가 되길.
"여호와의 날"(1절)은 심판의 날이다. 본문은 그 날이 "임박하였"음을 경고한다.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외치던 세례 요한과 예수의 외침이 오버랩된다. 말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종말론적 시각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여호와의 날"(15절)은 멸망의 날이요 괴로움의 날이다. 이는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오늘 오전 설교에서 들은 바와 같이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내가 되길.
고통의 정도를 묘사하는 그림 언어가 크게 세 가지로 나온다. 약혼남을 잃은 "처녀"의 슬픔(8절), 소제와 전제가 끊어진 "제사장"의 슬픔(9, 13-14절), 소출이 메마른 "농부"의 슬픔(10-12절)이 그것이다. "이러므로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도다" (12절) 오늘 저녁 메시지와 연결시켜 묵상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슬픔을 십자가상에서 대신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b) 예수의 피 밖에 없다. 정녕 예수의 피 밖에 없다.
본문은 짧은 소개(1절), 서론(2-3절), 본론(4-7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개글에서 성경은 예언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으며, 이후에 선포되는 말씀이 "여호와의 말씀"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1절). 서론에서는 앞으로 선포될 재앙이 전무후무한 것임을 특별한 수사법을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2절에서 "늙은 자들"이 특별히 언급된 것은, 이 일이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일임을 묘사하기 위해서이다. 즉, 오래 살아서 역사를 잘 아는 자들조차 겪은 적이 없어 "귀를 기울"여야 하는 엄청난 재앙이 찾아온다는 메시지인 것이다. 또한 이 일은 역사에 남아 후대에 전승될 만큼(3절) 후세인들에게도 낯선 일일 것이다. 이 무시무시한 재앙은 어떠한 것인가? 외적의 침입(6절)으로 인한 완전한 멸망(4절)이다. 이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 것이다(24절). 나는 변함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는지 되돌아본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져야 한다(16절). 믿음이 부족한 나에게 필요한 말씀. 또한 어디에 있든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는(18절) 내가 되길. 기도하자.
바울은 "끝으로"라는 단어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10절). 그는 "강건하여"질 것을 권면하는데,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엡 3:16에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중보하면서 사용했던 단어이다(6월 12일 큐티 참조). 거기에서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있는 것을 가지고 낙심하지 말라(엡 3:13)며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을 굳세게 다잡는다. 바울이 편지 말미에 다시 이 주제로 돌아온 것은, 그만큼 에베소 교인들이 실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 아닐까. 바울은 이를 다시 한 번 다른 표현을 사용하여 설명하는데,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그것이다(11절, 13절). 특별히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11절) 우리에게는 이것이 필요하다. 문득, 바울이 생각하던 마귀의 간계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단순히 ..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는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 세번째 시간이다. 오늘 본문에서 다루는 관계는 종과 상전 간의 관계로, 바울은 우선 종들에게 길게 권면하고(5-8절) 상전들에게 권면한다(9절). 종들에 대한 권면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5절, 7절)는 권고이다. 즉 상전이 보는 앞에서만 "눈가림"을 하는 것이 아니라(6절) 항상 "기쁜 마음으로"(7절), 그리고 "성실한 마음으로"(5절) 상전의 명령을 따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당장 이 땅에서야 큰 차이가 없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것(8절)이기 때문이다. 흔히 한국 기업의 크리스천 소유주들은 여기까지를 들어 피고용인들에게 절대 복종을 요구한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상..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두 번째 예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이다. 바울은 자식에게는 부모 공경을(1-3절), 부모에게는 자식 양육을(4절) 바르게 하도록 권한다. 자녀들에게 권면하는 말 안에서, 바울은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율법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셨다(출 20:12, 신 5:16).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는 통로이다(2절).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옳"다는 것이다(1절). 다른 무슨 근거가 필요한가? 이것이 옳은 것인데. 흔히 자녀와 부모의 관계는 일방적이 되기 쉽다. 아무래도 부모가 권위를 가지고 있다보니, 자녀에게만 부모에 대한 의무를 지워주기 쉽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본문이 이야기하는 주제를 깊이 묵상하기에는 아직 내가 경험(?)이 없으므로 바울이 설명 과정에서 사용하는 논증을 따라가며 다른 포인트를 묵상해보고자 한다. 본문의 키워드는 "한 육체"(31절)이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결합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는 창 2:24를 인용하여 자신의 근거로 삼는다. 둘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28절). 따라서 남자는 자신 같이 자기의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33절). 하지만 바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를 원한다(32절). 그리스도와 교회 역시 "한 육체"를 이루었기에 그리스도께서는 ..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엡 5:21)의 첫 번째 예로, 부부 간의 관계가 등장한다. 바울은 부부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유하며 서로 복종하고(22절) 사랑하는(25절) 관계를 가질 것을 권한다. 본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장차 남편이 될 (가능성이 있는) 나로서는 아내를 사랑함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부어주시는 사랑을 추체험하게 될 것이다(25절). 주께서 부족한 교회 안에서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27절)을 보시듯, 나 또한 불완전한 배우자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발견하길 원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대조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대조를 이루는 것은 "지혜 없는 자"(15절) 혹은 "어리석은 자"(17절)와 "지혜 있는 자"(15절)이다.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18절)이다. 이는 무엇을 불러오는가? "찬송"(19절)과 "감사"(20절)를 불러오지만, 동시에 "피차 복종하"는 모습(21절)을 가져온다. 우리는 흔히 찬송과 감사에만 신경 쓰느라 피차 복종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기 일쑤다. 하지만 에베소서 전반에 흐르고 있는 바울의 메시지를 고려해 볼 때, 바울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피차 복종"이 아니었을까. 나는 나의 형제 자매들에게 복종하고 있는가?
"빛"(8, 9, 13절)과 "어둠"(8, 11절)의 대조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본문. 어제 본문에 이어서 어둠(=이방인)에서 빛(=약속의 자손)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빛의 열매"(9절)를 택할 것인가, "열매 없는 어둠의 일"(11절)을 행할 것인가? 그의 빛 안에 살면갈 길 인도하시리주의 눈 내 일생을지키시리 늘 지키시리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자라면 "하나님을 본받"고(1절)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남들을 사랑해야 한다(2절)고 말한다. 이와 상반되는 "불순종의 아들들"(6절)은 어떤 자들인가? 음행하는 자, 더러운 자, 탐하는 자(3, 5절)이다. 바울은 이것이 "우상 숭배"와 같다고 말한다(5절). 우상 숭배를 반대하는 자라면 불상이나 단군상 모가지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그리고 공동체 안에 있는 음행과 더러움과 탐욕을 제해야 한다.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1절) 행할 수 있는 내가 되길.
바울은 여기서 "서로"라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25, 32절)하여 교회 공동체에 속한 자는 남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울의 가르침이 율법인 것은 아니다. 바울은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었으므로(25절) 이렇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권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체끼리 반목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다(30절). 나는 다른 이들을 "지체"로 여기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