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공동체 (50)
Lovos credit
요한이 예수께 나아와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보고 금지시켰다고 보고했다(49절). 예수께서는 그들을 반대하지 않는 자는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며 금지하지 말라고 하셨다(50절). 이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51절) 예수 일행이 사마리아 마을로 들어가자(52절) 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53절) 야고보와 요한은 분개하여 저들을 멸망시키자고 말하지만(54절) 예수께서는 그들을 꾸짖고(55절) 다른 마을로 향하셨다(56절). 이 두 가지 이야기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50절)와 "너희를 반대하는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첫 이야기에서는 제자 공동체를 반대하지 않지만 그들과 함께 하지도 않는 자가 등장한다(4..
지난 본문까지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면 응당 형제자매를 사랑해야 한다는 권면을 썼다. 이제 요한은 이어 사랑은 심판 날의 "담대함"을 준다는 근거를 제시한다(17절). 앞서 요일 2:28과 3:21에서도 요한은 동일한 표현(παρρησίαν)을 썼는데, 특히 2:28의 경우에는 맥락도 비슷하다. 오늘 본문은 이제 이 말을 부연한다. 우리가 주님처럼 담대할 수 있는 것(17절)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18절). 즉 참된 사랑을 안 사람이라면 더이상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심판 날"에도 담대할 수 있다. 요한은 이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재차 던진다(19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사도 요한은 미혹 당하지 말라고 말하며 새로운 권면을 시작한다(7절). 무슨 미혹을 말하는지가 다소 불분명한데, 다음 구절들을 통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의를 행하는 자는 예수처럼 의롭고(7절) 죄를 짓는 자는 "처음부터 범죄"한 마귀에게 속한다(8절). 요한은 변형해서 반복하는 문학 기법을 즐겨 쓰는데, 다시 한 번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인다(9절). 따라서 행실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난다(10절). 의를 행하지 않는 자,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마귀의 자녀요(10절),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11절). 그리고 가인의 예(창 4:1-15)를 들어 마귀에게 속한 자를 보여준다(12절). 가인의 행위는 악하고 아벨의 행위는 의로웠..
오늘부터 요한일서를 묵상한다. 요한은 생명의 말씀을 직접 경험했다고 말한다(1절). 그리고 그는 그 드러난 생명을 보고 증언하여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했다고 말한다(2절). 이는 결국 그들이 함께 성부, 성자와 사귐을 누리기 위함이었고(3절), 요한은 이를 씀으로써 자신의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한다(4절). 요한일서의 서두는 다른 서신서들의 서두와 사뭇 다르다. 보통 발신인과 수신인을 밝혀 쓰는데(cf. 요이 1, 요삼 1), 요한일서는 그런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서신이 어디로 보내졌는지는 알 수 없고, 발신인이 요한이라는 것도 내적 증거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요한복음, 요한이서와 메시지가 유사한 부분이 있고, 교회의 전승에서 본 서신서의 저작권을 요한에게 돌리고 있으므로 나 역시 그렇..
에스라는 제사장의 우두머리들을 따로 세워(24절) 예물로 받은 물품들을 맡긴다(25, 30절). 이는 매우 귀한 것들로(26-27절), 에스라는 그들에게 이 물품들을 예루살렘까지 무사히 가지고 올 것을 명한다(28-29절). 이제 에스라와 그를 따르는 무리는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했고(31절) 무사히 도착했다(32절). 예물 역시 잘 도착하였다(33-34절). 이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35절) 조서를 유다 땅의 총독들에게 전달했다(36절). 지난 본문까지 유다로 돌아갈 채비를 차리던 에스라는 이제 본격적으로 귀향길에 오른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는 일에 종사하던 "거룩한" 사람들(28절)인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30절) 하나님의 일에 사용될 것들을 맡긴다(25, 30절..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은혜로 얻은 구원과 교회를 연결시켜 설명한다. 먼저 바울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음을 다시 한 번 천명한다(8-9절).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한다(10절). 이 구절에서 바울은 "예비"라는 말을 쓰는데,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 경륜이 우리가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하심이었음을 드러낸다. 바울은 이어 수신자들이 어떤 존재들이었는지를 깨우쳐 준다(11절). 이방인에 무할례자였으며(11절),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의 외인이었다. 바울은 이 절망적인 상황을 가리켜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고 묘사한다(12절). 그랬던..
여호사밧은 온 이스라엘을 다니며 여호와 신앙을 회복시켰고(4절) 각 성읍마다 재판관을 세워(5절) 하나님 앞의 공평한 판결을 주문하였다(6-7절). 또한 예루살렘엗 사람을 세워 재판을 맡게 한 후(8절) 그들에게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도록 하였다(9-10절). 그리고 조직을 정비하였다(11절). 열왕기에 평행 본문이 따로 등장하지 않는 오늘 본문은 재판 개혁을 그 핵심으로 한다. 4절만은 여호사밧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하나님께 돌아오게 했다는, 조금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기자는 이 내용과 그 이후 내용이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즉,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공의로운 재판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여호사밧은 유다 각지의 재판관들에게(6-7절), 그리고 예루살렘의 재판관들..
오늘 본문은 성전 내부의 지성소(8-14절)와 성전 앞에 놓은 기둥(15-17절)을 기술한다. 지성소 본문의 평행 구절은 왕상 6:20-28에, 기둥 본문의 평행 구절은 왕상 7:15-21에 있다. 각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그 사이에 누락된 본문을 살펴보자. 누락된 본문은 성소와 지성소에 대한 설명(왕상 6:29-36)과, 성전 건축 기록(왕상 6:37-38), 왕궁 건축 기록(왕상 7:1-12), 그리고 히람에 관한 기록(왕상 7:13-14)이다. 히람/후람에 관해서는 역대기가 다른 기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대하 2:13-14) 모순된 기록을 뺐다고 이해할 수 있고, 왕궁 건축 기록은 성전에 맞춰진 초점을 옮기지 않으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성전 건축 기록은 성전과 그 기물들을 한 번에 완성한 것..
다윗은 이제 솔로몬에게 설계도를 넘겨주고(11, 12절) 필요한 모든 기물의 수치와 무게를 알려준다(13-18절). 이는 여호와께서 알려주신 것이었다(19절). 또한 다윗은 솔로몬을 격려하며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20절)과 이스라엘 백성이 도울 것(21절)을 알려준다. 오늘 본문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과 그 기물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이다(19절). 본문은 성전에 들어가는 모든 구조와 기물을 지루할 정도로 열거하고 있는데(11-18절), 이는 하나도 빠짐 없이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그대로 전달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다윗이 솔로몬을 격려하는 대목에서 그의 논점은 두 가지인데,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이 마무리 될 때까지 솔로몬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20절..
하나님은 선견자 갓을 보내 세 가지 재앙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다윗에게 말씀하신다(9-12절). 다윗은 하나님의 손에 빠지기를 원한다며 전염병을 택했고(13절) 이로 인해 7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이 죽었다(14절). 여호와의 천사가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심판을 하려 할 때(15절) 다윗은 엎드려 간구하여(16절) 이스라엘을 용서해 달라고 청한다(17절). 평행 본문인 삼하 24:11-17과 비교해 보면, 16절이 추가된 것을 빼고는 거의 변한 것이 없다. 16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목전에 임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다윗의 회개가 통전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묘사이다. 또 하나 유의미한 변화로 기근의 연수가 7년에서 3년으로 바뀐 것(12절)은, 3이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함으로 보인다. 오늘 본문에서 드러나는 ..
궤를 옮기기 시작하자, 다윗은 레위 자손들에게 음악을 연주할 것을 명령한다(16절). 레위 자손들은 다양한 악기를 동원하여 음악을 연주했다(17-24절). 다윗과 레위 사람들은 세마포 겉옷을 입고(27절) 즐거이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다(25-28절). 다윗의 아내 미갈은 이를 업신여겼다(29절). 다윗은 궤를 옮겨놓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 후(1절) 백성들에게 축복과 선물을 주었다(2-3절). 그리고 궤 앞에서 섬길 레위인들을 임명하였다(4-6절). 오늘 본문에는 레위 자손의 명단이 여러 번 등장한다. 첫 번째 명단은 17-18절에서, 두 번째 명단은 19-23절에서, 세 번째 명단은 24절에서(이걸 따로 나눈 이유는 "궤 앞에서 문을 지키는 자"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명단은 5-..
사울이 죽고 난 뒤, 이스라엘이 모두 모여 다윗을 왕으로 추대한다(1-3절). 다윗은 여부스 사람들이 점거하고 있던 예루살렘에 나가서(4절) 그곳을 점거한 후(5절) 수도로 삼았다(7절). 요압은 예루살렘 공성전에서도 큰 공을 세웠고(6절) 그 이후 성을 중수하는 데에도 기여했다(8절). 하나님이 함께 하신 덕분에 다윗은 더욱 강해져갔다(9절). 오늘 본문 역시 사무엘하 5:1-10의 본문을 참조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사울의 죽음 직후를 다루고 있는 삼하 1-4장의 내용이 역대기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당 내용은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으로 모시는 자들과 다윗을 따르는 자들이 내란을 벌인 내용인데, 이 내용을 삭제했다는 것으로부터 역대기 기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계속된다.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먼저 혼자 가서 권고하고(15절), 다음에는 한두 사람과 함께 가고(16절),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서 권고하고(17절) 포기하라. 우리에게는 매고 푸는 권세가 있고(18절), 두 사람이 모여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19-20절). 오늘 본문은 교회의 권세에 대해 복음서에서 거의 유일하게 다루는 부분이다. 흥미롭게도, 같은 자료를 쓴 것으로 보이는 누가복음에서는 마태복음 18:15-20에 해당하는 부분을 한 절(눅 17:3)로, 마 18:21-35에 해당하는 부분을 또 한 절(눅 17:4)로 처리했다. 누가복음에서는 두 절의 내용이 부드럽게 이어지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완전히 다른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포인트는 무엇인..
디도에게 거짓 교사들을 대적할 것을 권면한 사도 바울은 이제 교회 성도들을 대하는 법을 이른다. 목회자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에 서 있는 것이다(1절). 이로써 교회의 나이든 남녀들이 여생을 거룩하게 보낼 수 있도록 권면하여야 한다(2-3절). 앞의 본문과 이후의 본문을 잇는 중요한 구절이 1절이다. 사도 바울은 "오직"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라고 명령한다(1절). 거짓 교사들이 횡행하는 당시 그레데 교회의 상황에서, 바울이 세운 목회자였던 디도가 지켜야 하는 것은 "바른 교훈"이었던 것이다. 이 바른 교훈은 성도들의 삶을 계도하는 데 사용되었다(cf. 딛 2:15). 오늘 본문을 통해 당시 나이든 남녀가 빠지기 쉬웠던 함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나이든 남자들은 아마 세속적인 모습으로 생각 없..
이제 편지 말미에 이르러 바울은 문안 인사를 주고 받는다. 먼저 편지를 전달하는 두기고(7-8절)와 오네시모(9절)를 소개하고, 바울과 함께 있는 자들의 인사를 전한다(10-14절). 골로새 교회 뿐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도 인사를 전한 바울(15-17절)은 마지막으로 친필로 문안 인사를 남긴다(18절).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의 애정이 묻어난다. 바울은 "함께"라는 단어로써 동역자들의 수고를 표현한다. 두기고는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의 종이 된 자이고(7절), 아리스다고는 바울과 "함께" 갇힌 자이며(10절), 할례파 교인들은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힘쓰고 있었다(11절). 에바브라(12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특별한 호칭으로 보아 골로새 교회의 감독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예수로 새사람이 된 자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11절). 바울은 이 신학 위에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며 골로새 교회를 권면한다(12-15절). 그리고 신자의 모임이 어떠한 모습인지(16절), 신자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17절) 간략하게 소개한다. 예수 안에서 모든 차별이 무의미해졌다! 바울은 당시 사회가 사용하던 몇 가지 잣대를 예로 제시한다. 헬라인-유대인, 할례파-무할례파, 종-자유인의 이항 구조에 덧붙여 사회의 천대받던 사람들인 "야만인"과 "스구디아인"까지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 들어왔다(11절).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계시므로, 인간이 보기에 천한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는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해야 하고(13절) 사랑의 띠를 매야..
바울은 기쁘게 고난을 받으며(24절) 이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이해한다(25절).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비밀(26절)이 그리스도로 드러났다(27절). 바울의 수고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가르치기 위함이다(28-29절). 앞선 본문 마지막에 자신이 "복음의 일꾼"이라고 천명한 바울(골 1:23)은 그 직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강조한다(25절). 바울의 직분은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으로(28절), 이를 위해 바울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29절). 그리스도는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비밀이요, "영광의 소망"이시다(26-27절).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이해한다(24절). 이 구절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조금 더 묵상해 보고자 한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베냐민과 통혼하지 않기로 한 맹세 때문에 베냐민이 사라질 것을 우려한다(16-18절). 고민 끝에 그들은 실로에서 이뤄지는 명절 축제에서(19절) 춤추는 여인들을 납치하라고 베냐민 지파에게 권한다(20-22절). 베냐민 지파는 그대로 실행하였고(23절), 모여 있던 이스라엘은 각자의 기업으로 돌아갔다(24절). 이스라엘 자손이 취한 마지막 방법도 옳지 않은 것이었다. 자신들의 잘못된 맹세(18절)로 공동체의 일부가 사라질 위기(17절)에 처하자, 그들은 하나님께 묻기보다 사람의 꾀에 의존하여 '납치'라는 잘못된 방법을 택한다(20-22절). 그리고 납치 당한 여인은 자의로 베냐민 지파에게 간 것이 아니므로 맹세를 범하는 죄가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22절). 이 황당한 에피소드는 묵..
이스라엘은 야베스 길르앗 주민이 한 명도 총회에 오지 않은 것을 보고(8-9절) 그들을 공격하여 죽이고(10-11절) 처녀 400명을 얻었다(12절). 이어 베냐민 지파에게 평화를 공포하고(13절) 그 여자들을 그들에게 주었지만 여전히 여자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14-15절). 이스라엘이 야베스 길르앗을 공격한 것은 자신들의 맹세에 따른 것이었다(삿 21:5). 베냐민과 통혼하지 않기로 잘못 맹세하여 후회한 이스라엘(삿 21:1)은 다시 한 번 잘못된 맹세를 한다. 이 두 사건은 흥미로운 병행 구조를 이루는데, 둘 다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가 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 맹세를 통해 베냐민 지파가 무너지게 되었다면, 두 번째 맹세는 므낫세 지파에 속한 한 도시(민 32장)를 멸망시켰다. 두 경우 모두 ..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투에 승리한 후 함께 베냐민과 통혼하지 않기로 서약한다(1절). 이후 이들은 벧엘로 이동하여 하나님 앞에서 베냐민이 갈라져 나간 것을 슬퍼하고 제사를 드렸다(2-4절). 그들은 자신들의 맹세가 실수였음을 깨닫고 뉘우친다(6-7절). 분명 베냐민 지파는 죄를 지었고,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상응하는 징계를 내렸다. 하지만 그들은 과도한 맹세까지 해버린다(1절). 아마 인간적인 분노에 사로잡혔던 것이 아닌가 싶다. 전쟁이 끝나고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즉시 깨달았고(6-7절), 하나님 앞에서 울면서 이 문제를 아뢴다(2-4절). (하나님의 답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하자.) 공동체 안의 죄를 다루는 문제에 있어, 분노에 사로잡혀 사랑을 잊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