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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는 사람이 미래의 일을 알 수 없다고 고백한다(1절). 사람이 어떻게 살았더라도 결국은 악이 가득하여 죽고 말 것이다(2-3절).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낫다(4절). 이는 죽은 자들에게 돌아갈 몫이 영영히 없기 때문이다(5-6절). 따라서 기쁨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옳다(7절). 외모를 단정히 하고(8절), 가정을 행복하게 꾸려라(9절). 일을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하라(10절). 이는 죽은 후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10절). 이번 본문은 죽음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1-3절과 4-10절로 나누어 볼 수 있을 듯 하다. 전반부에서는 죽음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며, 죽음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가르친다. 의롭게 사는 사람이나 지혜롭게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들이 항상 좋은 결과를 얻..
오늘은 지혜에 대한 잠언이다. 전도자는 스스로 지혜를 쫓았으나 잡지 못했음을 고백한다(23-24절). 지혜와 명철을 연구하던 그(25, 27절)는 음녀를 피해야 한다는 지혜를 얻었다(26절). 또한 여자에게는 지혜가 없음을 깨달았고(28절), 하나님의 창조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죄성이 문제임을 깨달았다(29절). 오늘 본문 역시 명백한 주제로 묶여 있지 않다. 다만 모든 경구들이 지혜와 연결되어 있다. 먼저, 전도자는 사람이 온전히 지혜를 취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역설한다(23절). 그 누구도 지혜에 "통달"할 수 없다(24절). 이는 지혜라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같은 지혜를 인간이 어찌 가질 수 있겠는가(cf. 욥 38-41장)? 그럼에도 전도자는 지혜를 연구한다(2..
오늘 본문은 이전 본문에 연결되는 내용으로 보인다. 전도자는 먼저 지혜를 찬양하고(19절), 이어 온전한 의인이 존재할 수 없음을 가르친다(20절). 그리고 사람들의 평판에 신경을 쓰지 말라고 권한다(21-22절). 개역개정은 이 단락을 이전 단락과 나누어 놓았지만,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좀 더 일관성 있는 해석을 낳을 것 같다. 우선 이전 본문(전 7:11-12)처럼 지혜는 좋은 것으로 나타난다(19절). 이전 본문에서 지혜는 돈과 비견되었는데, 이번 본문에서는 권력과 비견되고 있다. 권력자 열 명의 권력을 합쳐 놓아도 지혜자의 지혜를 감당할 수 없다. 이는, 전 7:12를 따르자면,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혜 있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본문은 이어 두 가지 예를..
하나님이 하신 일은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다(13절). 오직 하나님만이 미래를 아시기에, 형통을 즐거워하고 곤고 가운데 반성하는 것이 옳다(14절). 항상 의인이 성공하고 악인이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15절). 사람은 지혜와 공의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더라도 망하고(16절), 지혜와 공의를 완전히 무시해도 망한다(17절). 그저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삶의 지혜다(18절).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인간의 유한함에 초점이 맞춰 있다.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항할 수 없고(13절), 하나님은 다 아시는 미래도 알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14절). 따라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루하루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옳다. 만약 오늘이 형통하다면 그에 감사하며 기뻐할 것이요, 오늘이 곤고하다면 혹 ..
오늘 본문은 격언 모음집 같은 느낌이다. 어떻게 본문 연구를 해야 할까 생각해 보았는데, 짤막짤막한 경구들이라 하나씩 살펴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먼저 전도자는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다고 한다(8절). 이 구절은 지난 본문 1절과 대응시켜 보면 좋다. 거기서 전도자는 명성을 얻는 삶이 좋고, 그보다 더 이상 괴로움을 겪지 않아도 되는 죽음이 낫다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모든 일이 마무리되는 시점에는 더 이상 불확실성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시작하는 시점보다 낫다. 참는 마음과 교만한 마음은 1절의 "좋은 이름"과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다. 좋은 이름을 내기 위해서는 교만하게 구는 것보다 참는 것이 낫다. 이어 전도자는 분노에 관한 격언을 준다(9절). 개역개정은 9..
오늘 본문은 삶과 지혜에 대한 통찰을 나눈다. 먼저 전도자는 삶과 죽음, 잔칫집과 초상집을 비교하여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할지를 가르친다(1-4절). 모든 사람의 끝에는 죽음이 있고(2절), 이것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 지혜이다(4절). 우매한 자들은 생각 없이 즐기나(6절), 그를 따르느니 지혜로운 자들의 견책을 받는 것이 더 유익하다(5절). 오늘 본문은 격언 형태로 되어 있고 다양한 수사법이 사용되고 있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가장 먼저 전도자는 좋은 "이름"과 좋은 "기름"을 비교한다(1절). 기름은 향료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향기를 날리는 이름이 향료보다 낫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세상을 산다 해도 그보다 세상을 떠나는 것이 더 낫다(1절). 더..
그간 미국은 연휴였어서 큐티를 하루 건너뛰었다. 지난 본문에서 이어지는 본문으로 계속한다. 오늘 본문은 짤막짤막한 경구가 이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주제별로 끊어보자면, 식욕과 식탐(7절), 지혜의 유익과 헛됨(8-9절), 역사의 반복성(10절), 헛됨의 애가(11-12절)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주제는 먹는 것이다. 사람이 수고하는 이유는 결국 먹기 위함이다. 이는 창세기 말씀의 반영이다.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하지만 자족하지 않는다면, 식욕은 완전히 채울 수 없다. 전도자가 계속해서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이 낙이라고 말하는 것을 감안할 때, 여기서 이야기하는 "식욕"은 1차적인 욕구로서의 식욕이 아니라 식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본문은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13절)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미 독자가 그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논리가 진행된다. 본문을 근거로 이야기를 재구성해보자면, 어느 나라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젊은이가 감옥에 갇혀 고초를 당한 끝에(14절) 왕의 다음 자리에 올랐고(15절), 결국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13절)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다(14-15절). 하지만 그가 죽은 이후 후세 사람들은 그를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16절). 이 이야기는 요셉, 혹은 다윗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정확히 그들의 이야기와 대응되지 않는 걸로 봐서, 어쩌면 이 이야기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우화였는지도 모르겠다. 전도자는 이 이야기로부터 두 가지 상반된 교훈을 끌어낸다. 첫째는 지..
이제 전도자는 공의와 재주의 두 가지 측면에서 인간사를 살펴보고 다시 한 번 헛됨을 깨닫는다. 세상의 권세자들은 약자들을 학대하나, 약자들은 위로를 받지 못한다(1절). 그래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고(2절), 죽는 것보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3절). 재주가 많은 사람은 이웃의 시기를 받고(4절), 재주가 없는 사람은 혼자 고생하고 만다(5절). 따라서 재주가 없는 편이 차라리 낫다(6절). 오늘 본문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고(2절), 죽는 것보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은가(3절)? 그렇다면 본문은 자살을 조장하고 있는가? 그리고 재주와 지혜는 정녕 없는 것이 나은가(6절)? 이는 잠언의 가르침과 상충되지 않는가? 이러한 수사법들은 저자의 진의를 표현한다기보다 본래 하려..
전도자는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에 관한 교훈을 남긴다(12절). 지혜와 우매의 관계는 빛과 어둠의 관계와 같으나(13-14절), 지혜자나 우매자나 결국 같은 일을 당한다(14-15절). 그 일이란 죽음이고, 죽은 뒤에는 둘 다 잊혀질 것이다(16절). 따라서 사는 것은 헛된 일이다(17절). 오늘 본문은 지혜에 관한 통찰을 다루고 있다. 전도자는 후세인들이 지혜에 관해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왕으로서 겪은 경험보다 새로운 것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12절) 자신의 교훈에 권위를 둔다. 비록 지혜가 사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맞지만(13-14절), 죽고 난 뒤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16절).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16절) 따라서 지혜를 추구하는 것도 헛된 일이다. 전도..
전도자는 인간의 능력과 지혜의 허무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힘을 다해 세상만사를 연구해 보니 인생들이 하는 모든 일은 다 괴롭고 헛된 것이었다(13-14절). 인간의 힘은 그 한계가 너무도 분명했다(15절). 그는 자신의 지혜를 뽐내며(16절) 지혜와 우매에 대해 연구해 보았지만 그것도 헛된 것이었다(17절). 지혜가 많으면 번뇌가 많을 뿐이었다(18절). 인간의 노력은 헛되다. 왜냐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에 한계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15절). 많은 이들이 지혜를 좋은 것으로 여기지만, 지혜를 추구하는 노력 또한 헛되다(17절). 지혜가 많으면 번뇌가 많고, 지식이 많으면 근심이 많을 뿐이기 때문이다(18절). 여기서 전도자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12절), 또 지혜로운 자로서(16절)..
디도에게 거짓 교사들을 대적할 것을 권면한 사도 바울은 이제 교회 성도들을 대하는 법을 이른다. 목회자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에 서 있는 것이다(1절). 이로써 교회의 나이든 남녀들이 여생을 거룩하게 보낼 수 있도록 권면하여야 한다(2-3절). 앞의 본문과 이후의 본문을 잇는 중요한 구절이 1절이다. 사도 바울은 "오직"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라고 명령한다(1절). 거짓 교사들이 횡행하는 당시 그레데 교회의 상황에서, 바울이 세운 목회자였던 디도가 지켜야 하는 것은 "바른 교훈"이었던 것이다. 이 바른 교훈은 성도들의 삶을 계도하는 데 사용되었다(cf. 딛 2:15). 오늘 본문을 통해 당시 나이든 남녀가 빠지기 쉬웠던 함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나이든 남자들은 아마 세속적인 모습으로 생각 없..
앞선 본문에서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언급한 바울(딛 1:9)은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부연한다. 그들은 할례파 중에 많이 있고(10절),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잘못된 가르침을 베풀어 가정들을 무너뜨린다(11절).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르지만 행위로 하나님을 저버린 자들이다(15-16절). 바울은 디도에게 그레데인들을 엄히 꾸짖어(13절) 올바른 가르침을 따르게 하라고 권면한다(14절). 오늘 본문은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할례파"(10절)나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한다(16절)는 표현으로 보건대 이들은 율법주의자들이었던 것 같다. 이들은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가르쳤는데(14절), 15절로 보건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율법대로 엄격히 구분하여..
아하수에로와 하만은 에스더가 베푼 두 번째 잔치에 참석한다(1절). 왕이 다시 한 번 소원을 묻자(2절), 에스더는 이제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민족을 왕에게 구한다(3-4절). 그게 누구인지 묻는 왕에게(5절) 에스더가 하만을 지목하자(6절) 하만은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한다(7-8절). 하지만 왕의 분노는 하만을 나무에 달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9-10절). 드디어 하만의 최후가 등장했다.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 속에서 에스더의 기지가 빛을 발한다. 에스더는 자신과 유다 민족의 멸망을 단순히 개인적인 비극으로 묘사하는 대신, 왕의 제국에 손해가 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4절). 그 결과 아하수에로는 에스더의 슬픔을 제국의 손해로 연결시켜 분노할 수 있었고(5절), 결국 하만을 제거하기에 이른다(10절). 본..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를 뽑는다는 명령이 반포되었다(8절). 에스더를 비롯한 전국의 처녀들이 그 자리에 뽑혀 나가게 되었다(8-9절).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민족 정체성을 드러내지 말라고 명하였고 에스더는 그 말을 따랐다(10절). 모르드개는 후궁 뜰 앞을 매일 방문하여 에스더를 챙겼다(11절). 에스더는 "헤개의 수하에 속"했고(8절), 헤게는 에스더를 "좋게 보"았다(9절). 여기서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에 동시에 속해 있는 우리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세상에 속해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한 가지 눈여겨 볼 점은, 에스더가 "자기의 민족과 종족을 말하지" 않은 점이다(10절). 유다인인 것이 부끄러웠던 것일까? 아니다. 쓸데없는 오해를 사지..
이번 주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수련회가 있는 관계로 그 기간에는 큐티를 못 할 것 같다. 일단 미리 조금씩 당겨서 큐티를 하고자 한다. 야고보서 3장은 크게 보아 말에 대한 가르침(1-12절)과 화평에 대한 가르침(13-18절)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 두 부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한다는 말로써 견고히 이어져 있다(9절). 말을 하는 것이 업인 "선생"은 사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1절). 이는 말에 실수가 많기 때문이다(2절). 재갈과 키가 말과 배를 조종하듯(3-4절), 혀는 작지만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5절). 야고보는 혀를 길들일 수 없는(7-8절) "불의의 세계"(6절)라며 강하게 경고한다. 이어 야고보는 하나님을 찬송하던 입으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이 옳지 ..
사도 야고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쓴다(1절). 그는 시험 가운데 인내를 이루라는 권면(2-4절)과 지혜를 간구하라는 권면(5-8절)으로 편지를 시작한다. 시험은 인내를 만들어 내기에(3절) 기쁘게 받을 만한 것이다(2절). 이는 사도 바울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설명한 것(롬 5:3-4)과 같은 맥락에 위치한다. 야고보는 인내를 이룰 때 아무 부족함 없이 온전해진다고 권면한다(4절). 여기 이은 두 번째 권면은 지혜에 관한 것이다.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라(5절). 다만 의심하지 말라(6-8절). 아, 인내와 지혜, 이 얼마나 내게 필요한 가치인가. 지금 나를 시험하는 "여러 가지 시험"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이를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니, 감당하..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아내-남편 관계(18-19절), 자녀-부모 관계(20-21절), 종-상전 관계(22-25, 1절)에 대해 고루 권면이 나오고, 기도에 관한 권면(2-4절)과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에 대한 권면(5-6절)까지 다뤄진다. 전반부의 아내-남편, 자녀-부모, 종-상전 관계는 흥미로운 대칭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내(18절), 자녀(20절), 종(22절)은 모두 남편, 부모, 상전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순종의 근거는 모두 "주"에게로 소급된다. 마찬가지로 남편(19절), 부모(21절), 상전(1절)은 아내, 자녀, 종을 괴롭히면 안 된다. 바울은 여기서 사회에 존재하는 위계 질서를 인정하는 동시에,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학대하..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1절). 바울의 노력은 가장 귀한 지혜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2-3절). 바울은 성도들이 교묘한 말에 빠지지 않기를 원했다(4절). 골로새 교인들은 행함과 믿음을 잘 지키고 있었지만(5절), 바울은 그 신앙을 굳게 지키라고 재차 권면한다(6-7절). 철학과 헛된 속임수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다(8절). 이제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쓴 목적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깨닫게 함"에 맞춰져 있었다(2절). 하지만 사도 바울이 떠난 후(1, 5절) 성도들 주위에 "교묘한 말"로 주의를 돌리려는 자들이 생겨났고(4절), 그들의 본질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에 맞춰져 있었다(8절). 바울은 이 어려운 상황..
이스라엘 장로들은 베냐민과 통혼하지 않기로 한 맹세 때문에 베냐민이 사라질 것을 우려한다(16-18절). 고민 끝에 그들은 실로에서 이뤄지는 명절 축제에서(19절) 춤추는 여인들을 납치하라고 베냐민 지파에게 권한다(20-22절). 베냐민 지파는 그대로 실행하였고(23절), 모여 있던 이스라엘은 각자의 기업으로 돌아갔다(24절). 이스라엘 자손이 취한 마지막 방법도 옳지 않은 것이었다. 자신들의 잘못된 맹세(18절)로 공동체의 일부가 사라질 위기(17절)에 처하자, 그들은 하나님께 묻기보다 사람의 꾀에 의존하여 '납치'라는 잘못된 방법을 택한다(20-22절). 그리고 납치 당한 여인은 자의로 베냐민 지파에게 간 것이 아니므로 맹세를 범하는 죄가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22절). 이 황당한 에피소드는 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