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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전 7:23-29

로보스 2016. 2. 24. 03:00

오늘은 지혜에 대한 잠언이다. 전도자는 스스로 지혜를 쫓았으나 잡지 못했음을 고백한다(23-24절). 지혜와 명철을 연구하던 그(25, 27절)는 음녀를 피해야 한다는 지혜를 얻었다(26절). 또한 여자에게는 지혜가 없음을 깨달았고(28절), 하나님의 창조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죄성이 문제임을 깨달았다(29절).


오늘 본문 역시 명백한 주제로 묶여 있지 않다. 다만 모든 경구들이 지혜와 연결되어 있다. 먼저, 전도자는 사람이 온전히 지혜를 취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역설한다(23절). 그 누구도 지혜에 "통달"할 수 없다(24절). 이는 지혜라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같은 지혜를 인간이 어찌 가질 수 있겠는가(cf. 욥 38-41장)?


그럼에도 전도자는 지혜를 연구한다(25, 27절). 그래서 몇 가지 중요한 원리들을 밝혀낸다. 악과 미련이 얽혀 있고, 미련이 결국 사망으로 끌고 간다는 사실(25절)을 그는 악한 여자의 예를 통해 찾아낸다. 그의 유혹에 빠지는 것은 사망보다 더 큰 괴로움을 가져다 준다(26절; 잠 23:27-28).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그 여자를 피할 수 있지만, 악한 자는 결국 그의 손길에 넘어갈 것이다(26절). 여기서 악과 미련이 만나고, 그 미련이 화를 불러온다.


또한 그는 여자에 관한 아리송한 경구를 남긴다(28절). 그는 사람을 찾는다. 남자 중에는 간혹 그 사람이 있지만, 여자 중에는 전혀 없었다. 문제는, 그가 찾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가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이다. NIV와 NLT는 모두 이를 진실한/도덕적인 사람을 찾는 것으로 해석했다. 앞서 음녀에 관한 구절이 나온 것을 볼 때, 이 같은 해석이 무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는 성차별적 발언이지만, 고대 사회의 컨텍스트 안에서는 쉽게 용인되는 경구였을 것이다.


끝으로 전도자는 사람(=남자)은 정직하게 지어졌지만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꼼수를 부린다는 점을 지적한다(29절). 이 세 가지 원리는 겉보기에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나, 하나로 묶어서 설명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있다. 여자는 부도덕하여 남자를 유혹한다(28절). 남자는 정직하게 살도록 지어졌지만, 미련하게도 악을 선택한다(29절). 즉,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26절). 이렇게 정리해 볼 때, 이는 창세기 3장의 레퍼토리를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 본문은 일견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세세히 연구해 보면 하나의 큰 물줄기가 흐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혜를 온전히 통달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전도자는 지혜를 연구하여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 여자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처음 읽을 때는 여자의 유혹을 성적인 것으로 해석했는데, 본문을 곰곰히 읽어보니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특히 이 본문이 창세기 3장을 반영하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저 '죄를 범하게 하는 유혹'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따라서 성별의 맥락을 제거하고 다시 정리해 보면 이렇다. 세상에는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유혹하려는 손길들이 있다. "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은" 자들이다(26절). 하나님은 그를 피할 수 있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우리는 대개 그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29절). 이것은 악한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요, 미친 것이다(25절). 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26절).


지금 나는 인생의 다음 행로를 결정하는 단계에 와있다. 아무래도 성취와 명예, 그리고 자리의 유혹이 내게 불어닥친다.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길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또 행하는 내가 될 수 있기를 원한다. 자비하신 예수여, 이 연약한 자를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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