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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2:12-17 본문
전도자는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에 관한 교훈을 남긴다(12절). 지혜와 우매의 관계는 빛과 어둠의 관계와 같으나(13-14절), 지혜자나 우매자나 결국 같은 일을 당한다(14-15절). 그 일이란 죽음이고, 죽은 뒤에는 둘 다 잊혀질 것이다(16절). 따라서 사는 것은 헛된 일이다(17절).
오늘 본문은 지혜에 관한 통찰을 다루고 있다. 전도자는 후세인들이 지혜에 관해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왕으로서 겪은 경험보다 새로운 것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12절) 자신의 교훈에 권위를 둔다. 비록 지혜가 사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맞지만(13-14절), 죽고 난 뒤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16절).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16절) 따라서 지혜를 추구하는 것도 헛된 일이다.
전도자가 지혜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긴 시각에서 봤을 때 지혜가 과연 영원불멸의 가치인가? 인간의 짧은 생애 동안에는 지혜가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 그가 죽고 나면 그 지혜는 가치를 잃어버린다. 확실히 이것은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다. 나는 학자로서, 종종 지식 그 자체가 영원한 가치를 지닌 양 행동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배우고 익히는 것은 좋지만,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 다시 돌이켜 본다.
인간의 학문은 영원불멸하다고들 한다. 특히 과학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한 번의 끊김도 없이 계속 발전해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학자에게 자부심을 주는 것 외에 별 의미가 없다. 16세기의 과학은 지금의 과학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사와 우리의 관심사가 다르고, 그들의 방법론과 우리의 방법론이 다르다.
학자에게 학문은 '시대의 자식'일 수 밖에 없다. 이 시대가 옳다고 믿는 방법론을 가지고 이 시대가 옳다고 믿는 주제를 연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하는 학문이 200년 뒤에도 동일하게 인정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그 학문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200년 뒤의 학문은 지금의 학문과 '다른' 존재이다. 이런 관점에서, 학문 역시 영원하지 못하다.
게다가, 전도자의 말처럼 그 학문이 나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결국 나에게 의미 있는 '학문'이란, 나의 짧은 인생 동안 내게 효용을 주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학문 그 자체를 위해 인생을 바치는 것은 미련한 일일 것이다. 지혜를 추구하느라 인생을 허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점에 삶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며, 올바른 방향을 고민하는 내가 되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