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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두 가지 사건을 다루고 있다. 첫 번째 사건은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사건(1절)으로, 어느 백부장이 자신이 사랑하는 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께 유대 장로들을 보냈다(2-3절). 이들은 이 백부장이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회당까지 지어줄 정도의 사람이므로 도와달라고 간청했다(4-5절). 그런데 예수께서 가시는 길에 백부장은 다시 한 번 사람들을 보내 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6절). 그는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 말하며(7절) 예수의 주권을 인정한다(8절).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9절) 그 종은 깨끗이 나았다(10절). 다음 사건은 나인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11절). 예수께서 성문 근처에 이르시자 어느 시신을 메고 나오는 행렬을 마주치셨다(12절). 그 시신은 과부 어머니..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8일째에 예언대로 "예수"라고 지어졌다(21절). 그리고 예수가 태어난 지 33일 되는 날(레 12:4), 마리아와 요셉은 정결 예식(레 12:6-8)을 치르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22-23절). 레위기 본문의 원칙은 일년 된 어린 양을 바치는 것이고 가난한 자들에 한해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로 대체할 수 있었는데(레 12:6-8), 마리아와 요셉은 비둘기를 바친 걸(24절)로 보아 가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성전에 올라갔을 때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이라는 사람을 만났다(25절).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고(26절), 성령의 감동을 따라 성전에 갔을 때 예수 가족을 만났다(27절). 본문에서 시므온의 행적을 가리킬 때 매번 "성령"이 등장함에 ..
율법을 들은 이스라엘은 모여 금식하며(1절)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2절). 이들은 이 날 율법책을 읽고 죄를 고백하며 경배하였다(3절). 레위 사람들은 단 위에 올라 하나님께 부르짖었고(4절), 또한 하나님을 찬양했다(5절). 이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심을(6절), 그리고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에게 약속을 주신 후(7절) 그 약속을 이루심을(8절) 찬양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곱째 달 24일에 다시 모였다(1절). 이는 초막절의 마지막 날인 22일로부터 이틀 뒤였는데, 특별한 전통과 연관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날 이들은 금식하고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썼는데(1절), 이는 깊은 슬픔의 표현이었다. 게다가 이방 사람들과의 관계를 (아마도 그 날만) 끊고 죄를 자복하는 ..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자 하나님은 그 기도를 열납하신다(1절).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임하고(1-2절) 이스라엘은 그 앞에서 엎드려 감사하였다(3절). 솔로몬과 백성은 함께 큰 규모의 제사를 드렸고(4-5, 7절), 그 동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직분에 맞게 섬겼다(6절). 이 절기는 일주일간 계속되었고(8절), 여덟째 날 성회가 열렸으며(9절) 그 이후에야 모두 각자 장막으로 돌아갔다(10절). 오늘 본문의 평행 구절은 왕상 8:62-66이나 많은 내용이 추가되었다. 우선 열왕기에 있는 내용만 살펴보자면 4-5절과 7-8절, 그리고 10절이다. 즉, 열왕기의 내용과 새로 추가된 내용이 서로 교차 편집되어 있는 것인데, 새로 추가된 내용을 살펴보면 역대기 기자의 관심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1-3..
성전 건축을 마치고 솔로몬은 하나님께 성전 건축을 보고하고(1-2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축복한다(3-11절). 오늘 본문은 왕상 8:12-21과 거의 유사하며, 거의 유일한 차이점은 다윗과 더불어 예루살렘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부분(5-6절; 왕상 8:16)이다. 이는 예루살렘이 성전이 위치한 장소로서 중요한 곳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내용을 살펴본다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성전 건축이 하나님의 오랜 계획 안에 있었던 것이라고 고백하는 부분이다(4-6절). 특히 솔로몬은 하나님이 성전 건축을 위해 일부러 예루살렘과 다윗을 선택하신 것처럼 말하는데(6절), 이는 역대상 17:4-14의 계시와는 조금 다른 관점을 취한다. 그리고 솔로몬은 계속해서 성전 건축을 하나님께서 이루셨다고 고백한다(4, 12..
오늘 본문은 궤가 안치된 이후 아삽과 그 형제가 하나님을 찬양한 시를 담고 있다(7절). 모든 백성이 함께 찬양에 참여하였다(36절). 이 시의 내용을 들여다 보기 전에 그 출전을 먼저 살피자면, 시 105:1-15가 8-22절에, 시 96:2-13이 23-33절에, 그리고 시 106:1이 34절에, 106:47-48이 35-36절에 대응한다. 내용이 거의 그대로 반복되기 때문에 시편을 적절히 편집하여 이 시를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아래에서는 이 흐름에 맞게 끊어서 시를 이해해 본다. 먼저 8-22절은 다시 8-15절의 명령과 16-22절의 고백으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명령부에서는 하나님을 찬양(8-10절)하고 그가 행하신 일과 그가 명하신 일을 기억할 것(11-15절)을 명령한다. 그렇다면..
그 동안 잠시 슬럼프였다. 예수의 말씀과 나의 삶 사이의 괴리를 견딜 수 없어서 잠시 묵상을 쉬었다. 아직 그 괴리가 없어진 것은 아닌데, 그럼에도 꾸역꾸역 다시 말씀 앞에 나온다. 대신 짤막하게 묵상한다. 오늘 본문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구하면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7-8절), 인간 부모의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9-11절). 여기에 깔려있는 전제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부모-자녀의 관계와 같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 전체를 통틀어 반복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을 쓰신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와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
긴 전도서 여행을 끝내고, 이제 다시 신약으로 돌아간다. 더 긴 마태복음으로 2016년 전반부를 불태워보자.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소개한다(1절). 계보의 시작은 아브라함(2절)이요, 첫 번째 매듭은 다윗 왕(6절)에서 이루어진다. 두 번째 매듭은 유다 왕국의 멸망 시점에 지어진다(11절). 그리고 본문이 말하는 바(17절)와 같이 이 계보는 아브라함-다윗 14대, 솔로몬-여고냐 14대, 스알디엘-예수 14대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실 스알디엘-예수는 13대이다. 여고냐를 중복으로 세면 14대가 된다.) 이와 같은 구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먼저, 대수(代數)에 대해 생각해 보자. 14라는 수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7의 두 배이다. 따라서 1..
이 짧은 시편 속에서, 시인은 아마도 인간 관계로 인한 어려움 가운데 놓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청원한다(1절). 그를 괴롭히는 자들이 물러갈 수 있도록 간구한다(2, 3절). 이는 찬양의 근거가 된다(4절). 시인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청원한다(5절). 곤고함 가운데 놓인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시편은 그 때 하나님께 드릴 기도를 훌륭하게 예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나의 도움"이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다(5절). 그 분께 어려움을 솔직히 토로하고(2, 3절)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해야 한다(5절). 오늘 연구실에서 발표가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발표하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발표를 해야 하는 데다가,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은 지금까..
하나님의 역사를 되새긴 여호수아는 이제 결론으로 들어선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14절) 그는 만약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좋지 않다면 다른 신을 섬기라고 도전한다(15절). 이에 대해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신 역사를 기억해 볼 때(17, 18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고 영원히 그를 섬길 것이라고 약속한다(16, 18절). 역사를 돌아본다면 하나님을 버릴 수 없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경험해 보았다면 그를 부인할 수 없다. 여호수아의 신앙도, 이스라엘의 신앙도 모두 그들의 출애굽 여정에 한 올 한 올 새겨져 있는 하나님 체험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불행히도 이스라엘의 신앙은 훗날 변질되고 말았지만, 최소한 여호수아의 도전 앞에 내놓았던 응답..
유월절 고기는 "무교병"과 함께 먹어야 했다(출 12:8). 하나님은 거기에 더하여 유월절 이후 7일 동안 누룩이 들어있지 않은 무교병을 먹으라고 명령하신다(15절). 이 절기는 "무교절"이라 불리며(17절), 14일 저녁부터 21일 저녁까지 지켜야 했다(18절). 첫 날과 마지막 날에는 온 백성이 모이는 성회가 있었다(16절). 하나님은 무교절 기간 내에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이라는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신다(15, 19절).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무교병을 먹어야 했고(20절), 누룩은 아예 보이지 않도록 해야했다(19절). 도대체 무교병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엄격한 규례가 정해졌던 것일까? 힌트는 17절에 있다. "이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
오늘 본문으로 디모데후서는 끝이 난다. 바울은 자신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천명하며 문안 인사로 편지를 마친다. 바울은 디모데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문안 인사를 보내고, 자기 곁에 있던 사람들로부터의 인사를 전한다. 끝으로 그는 디모데와, 그와 함께 한 자들에게 축복을 빌고 있다. 바울의 사명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위해 주님께서 자신의 "곁에 서서" 힘을 주신다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바울을 들어 사용하사 이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셨다(17절).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를 지키셨고, 마침내 그를 구원하실 것이다(18절). 바울은 이것을 확신한다. 짤막한 고백이지만, 이 안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세 가지 시제를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사자..
God sent His son, they called Him Jesus He came to love, heal, and forgive. He lived and died to buy my pardon, An empty grave is there to prove my Savior lives. Because He lives, I can face tomorrow. Because He lives, All fear is gone. Because I know He holds the future, And life is worth the living just because He lives. How sweet to hold a newborn baby, And feel the pride and joy he gives. Bu..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나의 왕 내 노래 내 생명 또 내 기쁨 나의 힘 나의 검 내 평화 나의 주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1976년에 발표된 이 곡은 참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배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21) 사실, 어릴 적 이 찬양을 부르면서 가사가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내 안에 사는 분이 예수님이신데, 내가 죽는 게 유익하다고? 두 문장의 연관성이 어떻게 되는 거지? 설령 저 구절을 알았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이는 앞뒤 구절을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
이 애 이 애 걱정 마라 나도 같이 쓸어주마 나 위해 쓸자는 그 방 내가 쓸어 너를 주고 닦다가 닳아질 네 맘 내 닦아주마 쓸지 닦지 하던 마음 그것조차 맘뿐이고 님이 손수 쓸으시고 나까지도 앉으라시니 내 자랑이라곤 없소이다 참 없소이다 함석헌 선생의 시 의 일부. 김기석 목사님의 를 읽고 있다. 책장을 넘기다 위 시를 마주하게 되었다. 쿵,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귀하디 귀한 님을 맞이하려고 쓸고 닦고 하지만, 채비를 채 차리기도 전에 님이 오셨다. 준비 안 된 어수선한 광경을 보시며 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친히 비를 드신다. 난 곁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님은 청소를 마치시고,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시며 내게 앉으라고 권하신다. 부끄럽다. ..
다 표현 못 해도 나 표현하리라 다 고백 못 해도 나 고백하리라 다 알 수 없어도 나 알아가리라 다 닮지 못 해도 나 닮아가리라 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날 부요케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어쩌다보니 포스팅이 좀 늦었는데, 지난 주 엘티 시간에 불렀던 곡이다. 아마 전에 한 두 번 들어봤겠지만, 직접 불러본 건 처음이었다. 더듬더듬 따라부르는데 가슴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보여준 그 사랑을, 비록 나의 부족한 표현력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지라도,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노래한다. 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