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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다윗과 이스보셋이 각각 헤브론과 마하나임에서 왕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다윗은 유다 족속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고(4절a), 이스보셋은 그 밖의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9절). 흥미로운 점 하나는 나중에 남유다 왕국에 속하게 되는 베냐민 지파가 여기서는 이스보셋 편에 붙었다는 점인데, 이는 사울이 베냐민 지파 출신인 것(삼상 9:1-2)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짐작할 때 다윗이 유다 족속의 왕이 된 것도 유다 족속 출신(삼상 17:12)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왕이 되기 전까지 다윗은 어떠한 존재였는가? 인간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그는 이스라엘 왕의 미움을 받는 "패거리"의 두목일 뿐이었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신임..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만들어(17절) 자기 치하의 백성들("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명한다(18절). 이 노래에서는 반복적으로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라는 표현이 사용되면서(19절, 25절, 27절) 큰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다윗은 그들이 전사한 길보아 산들을 저주할 정도로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21절). 이 노래에서도 여전히 사울과 요나단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인용되며(19절), 그들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의 즐거움이 된다(20절). 시의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다윗은 그들을 칭송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용맹스러운 자들이었으며(22절, 23b절),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들이었다(23a절). 사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이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한 이유(12절)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패하여 죽었기 때문이었다(12절). 본문은 흥미롭게도 사울과 요나단을 여호와의 백성 및 이스라엘 족속과 병치함으로써 사울 역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또한 본문에서 사울은 악인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14, 16절)"로 나타난다. 다윗이 아말렉 청년을 죽인 것 역시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자를 죽였(다고 증언했)기 때문이었다. 실지로 사울은 스스로의 죽음을 자초했지만, 본문에서 사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죽은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비록 자신의 "주적"이었더라도, 비록 의롭게 살지 않는 왕이었더라도,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날샘은 아말렉 청년의 거짓말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본문이 정말 그 거짓말을 강조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특히 "보상"을 바랐다는 이야기는 그 흔적도 보이지 않는데 심리학을 쓰는 게 아닌가 싶고.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무엇보다 다윗이 그를 죽인 이유는 그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본문이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왔다는 기사(1절)로 시작하는 걸로 볼 때, 그리고 반복해서 그 청년이 "아말렉 사람"임을 강조하는 것(8절, cf. 13절)으로 볼 때, "아말렉 사람"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이 좀 더 맞지 않을까. 본문에서 "아말렉 사람"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를 거리낌 없이 죽이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10절, cf. 14절). 이는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세상적..
이 글은 동성애 논란에 엮인 글임. 나는 동성애자들이 교회 내에서 당하고 있는 고난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바이며, 현대 교회가 때론 성경을 왜곡하여 동성애를 핍박해왔다는 데에 동의한다. 하지만 과연 이 강연에서 이야기하는 성경 해석이 정녕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앞으로 제기할 의문은 철저히 성경해석학 및 조직신학의 범위 내에 있는 질문일 뿐이며, 동성애자들에 대한 공격/박해와는 별개의 문제임을 분명히 한다. 주어진 텍스트를 해석하는 작업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특히 성경과 같이 오래 전에 쓰여져서 현대의 시각에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텍스트는 더욱 그렇다. 이에 관하여 나는 복음주의자로서 성경의 영성을 무시하는 자유주의에도 반대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성경에 대한 문자적 ..
내 입장과는 별개로, 생각해 볼 만한 좋은 강연인 것 같아서 여기 소개한다. 아래의 한글 요약은 내가 한 것이며, 인용하는 성경은 개역개정을 기준으로 하였다. 이에 대한 내 코멘트는 별도의 글로 달도록 하겠다. 1. 전통적인 성경 해석에 따르면 동성애자들은 문제 있는 사람들이고, 죄를 범한 자들이며,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해석에 기반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들을 억압하고 박해한다. (최소한 심정적으로 이질감을 갖는다.) 2. 하지만 전통적인 성경 해석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2-1. 마태복음 7장(산상수훈 일부)에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6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창 8:6-12) 이 기사는 유명한 '노아의 홍수' 기사의 한 부분이다. 여기서 비둘기는 지면에 가득한 물이 다 사라..
God sent His son, they called Him Jesus He came to love, heal, and forgive. He lived and died to buy my pardon, An empty grave is there to prove my Savior lives. Because He lives, I can face tomorrow. Because He lives, All fear is gone. Because I know He holds the future, And life is worth the living just because He lives. How sweet to hold a newborn baby, And feel the pride and joy he gives. Bu..
처음 조직신학을 공부할 때부터 석연치 않았던 점이 바로 "정경"의 권위였다. 정경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구약성경은 백 보 양보해(예수께서 39권을 전부 인정하셨다는 문자적 증거는 없으므로) 예수께서 인정하셨기 때문이라고 쳐도, 신약성경은 누구에 의해 권위를 부여받는가? 흔히 조직신학 책에서는 "사도성"을 그 권위로 둔다. 하지만 그 역시 마땅치 않은 것은, 예컨대 와 같이 사도였는지 확실치 않은 저자의 작품은 어떤가? , , 도 저자가 사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본문 내적인 증거가 알려져 있지는 않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반례는 아예 그 저자가 밝혀져 있지 않은 히브리서이다. 이쯤 되면 어떤 조직신학 책에서는 "읽어보면 성령의 영감이 개입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라는 식의, 내가 보기엔 전혀 합..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나의 왕 내 노래 내 생명 또 내 기쁨 나의 힘 나의 검 내 평화 나의 주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1976년에 발표된 이 곡은 참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배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21) 사실, 어릴 적 이 찬양을 부르면서 가사가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내 안에 사는 분이 예수님이신데, 내가 죽는 게 유익하다고? 두 문장의 연관성이 어떻게 되는 거지? 설령 저 구절을 알았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이는 앞뒤 구절을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
내 모든 상황 나를 괴롭게 할 때 나의 주여 잠잠하라 하소서 절망의 파도 주를 원망케 할 때 나의 주여 잠잠하라 하소서 잠잠하라 잠잠하라 믿음이 없는 자처럼 어찌하여 잠잠하라 잠잠하라 절망을 주는 파도는 잠잠할지어다 대학부를 졸업한 이후 첫번째로 맞는 주일. 집회 시간에 시간이 비길래 대학 3부 집회에 참석했다. 여느 집회와 다름 없이 찬양으로 예배가 시작됐다. 주위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며 찬양을 따라 부르는데, 세 번째 곡은 어째 처음 듣는 곡이다. 가사를 좀 들어보고 찬양을 부르려고 잠잠히 눈을 감고 노래를 듣는다. 그런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가사 한 올 한 올이 내 간증이요 내 고백이었다. 관계의 어려움으로 괴로움이 가득하고, 끝없는 절망으로 입만 열면 원망이 쏟아지는 내 삶. 그런 나에게 ..
은혜로 충만했던 수련회가 끝나고, 아직도 박희원 목사님의 사자후가 머릿속에 쟁쟁한 상태에서, 졸업을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책, 을 손에 잡았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해서” 읽는 것은 참 오랜만의 일이다. 그리운 제자반의 내음을 알씬 느끼며 책을 펼쳤다. 저자인 오스 기니스는 특유의 박식함으로 “소명”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솜씨 좋게 풀어놓는다. 그 중심에는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라는 대명제가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많은 이들이 소명을 나 자신의 의지, 나 자신의 계획, 나 자신의 꿈과 혼동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명의 주체가 하나님 그 분이라는 것이다. 기니스는 이 당연한,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연해지지 않은 진리를 몇 개의 장을 할애하여 설명한다. 그렇다면 ..
이 애 이 애 걱정 마라 나도 같이 쓸어주마 나 위해 쓸자는 그 방 내가 쓸어 너를 주고 닦다가 닳아질 네 맘 내 닦아주마 쓸지 닦지 하던 마음 그것조차 맘뿐이고 님이 손수 쓸으시고 나까지도 앉으라시니 내 자랑이라곤 없소이다 참 없소이다 함석헌 선생의 시 의 일부. 김기석 목사님의 를 읽고 있다. 책장을 넘기다 위 시를 마주하게 되었다. 쿵,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귀하디 귀한 님을 맞이하려고 쓸고 닦고 하지만, 채비를 채 차리기도 전에 님이 오셨다. 준비 안 된 어수선한 광경을 보시며 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친히 비를 드신다. 난 곁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님은 청소를 마치시고,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시며 내게 앉으라고 권하신다. 부끄럽다. ..
요새 IVP 조직신학시리즈 중 제럴드 브레이의 을 읽고 있다. 벌코프, 그루뎀 등의 일반적인 조직신학 개론서들에 비해 넓고 깊게 신론을 다루고 있어 좀 더 머리쓰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책에 등장한 한 가지 주제,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짤막하게 다루어보고자 한다. 이 책 74-77쪽을 참조한다. 고대-중세 시대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지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책의 표현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용어로 알려질 수도 정의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지성의 언어를 넘어서 비존재(즉 개념을 넘어선)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일이 필요했다. 그 영역은 오직 황홀경 속에 있는 신비주의자에게..
난 주러 왔을 뿐인데 오히려 내가 받고 갑니다 눈물 닦아주러 왔을 뿐인데 내 눈물만 흘리고 갑니다 씻어주러 왔을 뿐인데 오히려 내가 씻겨졌습니다 고쳐주러 왔을 뿐인데 오히려 내가 치료되어 갑니다 전하러 왔는데 이미 이곳에 계신 예수를 보고 갑니다 꿈을 가지고 와 꿈을 보고 돌아갑니다 난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다만 다함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죠 사랑하러 왔는데 더 큰 사랑을 받고 돌아갑니다 죽은 영혼 살리러 와 내가 살아서 갑니다 난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더 주를 사랑하지 못하니 미안합니다 유은성 새 앨범의 타이틀 곡. 이번 여름 연인팀과 함께 하면서 느낀 점들이 잘 녹아 담긴 곡이다. 특히 "전하러 왔는데 이미 이곳에 계신 예수를 보고 갑니다" 가사를 들으면서 눈물이 왈칵 났다. 그래, 그 땅에는 이미..
나는 예전부터 그런 기도를 하곤 했다. "내 생명을 취하시더라도 여자친구가 구원 받는다면 드리겠습니다." 얼핏 보면 대단한 신앙의 고백이요, 순교자의 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그러한 나 자신을 뿌듯하게 여겼고, '왜 이런 기도를 하는데도 주님은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걸까?'라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오늘 대학부 예배 중에 을 부르게 되었다. 찬양하는 중에 갑자기 주님이 이렇게 물으시는 것 같았다. "얘야, 네 생명은 됐고, 네가 매일 두 시간씩 떼어서 기도할 때 그걸로 여자친구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네 시간을 나에게 줄 수 있겠니?" 머뭇거려졌다. '내가 그냥 칵 죽어버린다면 그건 드릴 수 있겠는데, 삶을 살면서 그 일부를 드리는 건...' 주님의 물음은 이어졌다. "만약 네가 그렇게 애지..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땅의 모든 끝 모든 족속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모든 열방이 주께 돌아와 춤추며 경배하게 하소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길을 만들자 십자가를 들고 땅 끝까지 우린 가리라 우리 주님 하늘 영광 온 땅 덮을 때 우린 땅 끝에서 주를 맞으리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전 뜨거웠던 때에는 주님이 오시는 것이 그렇게 기대되고 들뜰 수 없었다. 내 사모하는 주님을 볼 수 있다니, 그 아름다운 주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뜨거움이 식어가면서 재림에 대한 소망도 점점 사라져갔다. 그리고 이 곡을 만났다. 실로 오랜만에 외쳐본다. 마라나타,..
37장 전반부에는 유명한 "마른 뼈"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리 길지 않으니 전문으로 소개한다. 1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
14장 전반부에는 예수가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공격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 중에 다음과 같은 "비유"가 등장한다. 7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 14:7-11) 별로 어려운..
지극히 높은 주님의 나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세상의 신을 벗고서 주 보좌 앞에 엎드리리 내 주를 향한 사랑과 그 신뢰가 사그러져 갈 때 하늘로부터 이곳에 장막이 덮이네 이곳을 덮으소서 이곳을 비추소서 내 안에 무너졌던 모든 소망 다 회복하리니 이곳을 지나소서 이곳을 만지소서 내 안에 죽어가는 모든 예배 다 살아나리라 사랑하는 연변 단기 선교팀에서, 오늘 기도회 시간에 기도팀장이 부르자고 내놓은 곡이다. 처음 듣는 곡이었고, 기타 반주로 불렀기 때문에 멜로디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기도팀장이 이 노래를 세 번 부르자고 했다. 허겁지겁 두 번을 따라 부르고 나니 마지막으로 부를 때에는 가사를 좀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만난 "내 주를 향한 사랑과 그 신뢰가 사그러져 갈 때"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