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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하나님을 인식하기

로보스 2010. 11. 1. 02:13
요새 IVP 조직신학시리즈 중 제럴드 브레이의 <신론>을 읽고 있다. 벌코프, 그루뎀 등의 일반적인 조직신학 개론서들에 비해 넓고 깊게 신론을 다루고 있어 좀 더 머리쓰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책에 등장한 한 가지 주제,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짤막하게 다루어보고자 한다. 이 책 74-77쪽을 참조한다.

고대-중세 시대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지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책의 표현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용어로 알려질 수도 정의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지성의 언어를 넘어서 비존재(즉 개념을 넘어선)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일이 필요했다. 그 영역은 오직 황홀경 속에 있는 신비주의자에게만 알려졌던 것이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와 어거스틴의 대저(大著)들이 대표하는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체계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의 면전에서 겪을 수 밖에 없는 완전한 침묵, 완전한 유구무언의 당혹감을 피하기 위한 시도라 말할 수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번 LT 때 목사님이 <욥기>를 설명하시면서 "진리"란 하나님 그 분을 대면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던 것이 연상되었다. 친구들과 욥은 이러저러한 명제들을 가지고 "진리"의 문제를 따졌다. 그 때 홀연히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엄위 앞에 욥을 세우시며 "진리"를 대면하게 하셨다. 욥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욥 40:3-5).
1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 38:1-4)

그렇다면 "신비주의"가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을 제공하는 것인가? 종교개혁자들은 이 명제에 동의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은 신비주의 전통을 거부했다. 종교개혁자들은 황홀경을 경험했다는 주장을 일종의 주제 넘음(presumption)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신비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의 본질 자체를 검토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의) 역사들을 알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삼위일체의 위격들 안에서)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적절하게 이해되고 숙련된다면,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문제는 추상적인 사색으로 그리고 쓸모없는 사색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종교개혁자들은 말했다.
장로교 전통이 신비주의를 배격하는 뿌리가 여기 있다. 황홀경보다는 성경을 통한 "계시"가 더 신뢰할만 하지 않은가?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는 성경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무엇을 더 알고, 무엇을 더 인식하려 한단 말인가?

저자는 여기에서 칼 바르트의 신 인식론을 연결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조금 있으므로 일단 본문을 인용한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은 전적 타자 즉 다른 모든 존재와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라는, 칼 바르트가 말한 현대 개신교 신앙이 발전되어 나왔다. 불행히도 이 말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느냐에 대한 매우 분명한 이해를 항상 수반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때때로 오히려 기이한 형태의 무신론이 되었다. (중략) 일반적으로 동의되고 있는 사실은, 어떤 한 존재는 다른 존재들과 관련해서 정의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전적인 타자라면, 그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접촉점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 따라서 그러한 점에서 우리 인간 쪽에서 볼 때,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인류가 이제 '성년'(成年)에 이르러 하나님 없이 살아야 한다(Bonhoeffer)는 견해를 갖게 되었음을 보게 된다. 또한 하나님은 아예 홀로 내버려두어도 좋다(Cupitt: 영국의 포스트모던 신학자―역주)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바르트의 비평가들이 지적했다시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살아 있는 관계를 유지시켜 줄 수 있는 다리가 없어져 버렸다.
정통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책이니만큼 바르트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이 부분에 이르러 바르트의 계시론이 왜곡되어 인용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내가 바르트를 깊게 공부해 본 적은 없으므로 이하의 논의는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바르트 이해에 따른다. 저자가 옳은 비판을 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자.) 바르트는,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라고 외쳤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측에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계시"가 중요하다고 논한 것 아니었던가? 뒤집어 말하자면, 우리는 전적 타자인 하나님을 인식할 방법이 "전혀" 없지만,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기에 우리는 그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살아 있는 관계"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로 제공되는 것이다.

본문의 입장과는 달리 내 나름대로 바르트를 비판해보자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계시"라는 피조물과의 접점을 가진 하나님이 "전적 타자"라고 할 수 있는가? "계시"는 일종의 관계, 즉 하나님과 피조물들이 맺는 관계라고 볼 수 있고, 이렇게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님의 "타자됨"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닌가? "타자됨"과 "계시"가 동시에 유지될 수 있는 것인가? 난 아직 이 질문들의 답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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