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os credit

정경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본문

교리

정경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로보스 2011. 4. 14. 22:49
처음 조직신학을 공부할 때부터 석연치 않았던 점이 바로 "정경"의 권위였다. 정경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구약성경은 백 보 양보해(예수께서 39권을 전부 인정하셨다는 문자적 증거는 없으므로) 예수께서 인정하셨기 때문이라고 쳐도, 신약성경은 누구에 의해 권위를 부여받는가? 흔히 조직신학 책에서는 "사도성"을 그 권위로 둔다. 하지만 그 역시 마땅치 않은 것은, 예컨대 <유다서>와 같이 사도였는지 확실치 않은 저자의 작품은 어떤가?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도 저자가 사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본문 내적인 증거가 알려져 있지는 않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반례는 아예 그 저자가 밝혀져 있지 않은 히브리서이다. 이쯤 되면 어떤 조직신학 책에서는 "읽어보면 성령의 영감이 개입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라는 식의, 내가 보기엔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근거를 제시하곤 한다.

솔직히 말해 정경의 권위를 정경 내부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순환 논법이다. (그루뎀은 강력히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어쨌든 "논리적"으로 그런 건 사실 아닌가?) 그렇다면 정경의 권위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예컨대 내가 하나님께 직접 기도해보고 "정경을 믿어라!"와 같은 육성 응답이 들려야 권위를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 마음 속에서 "정경이 진리다!"라는 확신이 들면 그걸로 권위를 삼으면 되는가? 아니다! 우리가 믿기로,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는 정경 하나 뿐 아닌가!

최근 읽고 있는 <구약성서 비평학 입문>에서 이것과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들을 찾았기에 여기 발췌해 정리해둔다. 이 내용에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일리 있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정경비평학자들은 그들의 성서 해석에서 신앙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샌더스가 "정경과 공동체, 이들은 함께 공존한다. 하나가 없이 다른 하나는 존재할 수 없다"라고 한 이 말은 위의 전제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정경비평학자들은 성경을 정경화시킨 주체로서의 신앙 공동체가 성서 해석에서 성서 본문의 의미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이처럼 신앙 공동체가 본문의 의미를 결정해 온 결과로써[sic] 정경이 완성되었고, 그들이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것들은 정경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경비평학자들의 주된 관심은 과거의 신앙 공동체에 의해 정경화되고 또한 그들에게 신학적 의미를 제공한 본문이 현재의 신앙 공동체에는 어떤 의미를 제시하며, 그것들을 현재의 신앙 공동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240-241쪽)

존 바톤(John Barton)이나 해링턴 등은 정경비평을 비판할 때 다음 질문을 던진다: 어느 본문이 정경인가? 어느 정경이 기준이 되는가? 어느 공동체가 진정한 신앙 공동체인가? 이들은 이러한 질문들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답변을 요구하는데 대하여 정경비평이 명확한 대답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것의 한계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정경비평이 본문과 특정한 신앙 공동체의 관계성을 고려하면서 본문 해석을 시도하므로 주관적인 해석의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 어느 해석이든지 주관성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 위의 객관적인 질문에 답변을 제시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어느 특정한 해석자가 그가 속한 신앙 공동체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공동체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며, 그것이 그 공동체에 끼치는 신학적인 기능을 소개한다면 정경비평의 임무는 완수되는 것이다. 결국, 특정한 신앙 공동체가 사용하는 성서가 정경이며, 그 정경을 사용하는 신앙 공동체가 진정한 신앙 공동체라고 규정할 수 있다. (257-258쪽)

개신교회는 종교 개혁 시기에 가톨릭 교회의 교회 개념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공교회"라는 신앙 공동체 개념이 약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두려움에 정경의 권위를 공동체로부터 찾지 않고 정경 내부에서 찾으려는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앞서 논하였듯 순환 논법의 문제도 발생하고, 정경 내부에서 정경의 권위를 찾으려다 보니 "교리에 맞는" 해석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게도 된다. 예컨대 자료비평이나 편집비평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정경은 "원저자"에 의해 "영감으로" "그대로" 기록되었고, 처음 기록된 이후로 아무런 개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믿으면 정경 자체가 신비화되면서 정경의 권위는 세워지겠지만, 과연 그것이 기독교에 도움이 되는 태도일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