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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바울은 스스로 유대인임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할례의 가치에 대해 논증한다. 할례가 중요한가, 율법을 준수하는지 여부가 중요한가? 할례자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율법을 범하면 할례가 무의미해진다(25절). 무할례자가 율법을 행하면 그는 할례 받은 자나 다름 없다(26-27절). 바울은 이에 따라 상당히 급진적인 주장을 한다. 표면적으로 유대인인지 아닌지, 할례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28절).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이다(29절)! 바울은 육체에 행하는 할례는 "율법 조문"에 의한 것이요 "사람에게서" 나오는 칭찬으로 여기고 있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영"에 의한 할례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칭찬이라고 이야기한다(29절). 바울의 이..
지난 본문에 이어 오늘 본문은 율법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선 바울은 17-20절에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을 낱낱이 드러낸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20절).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맹인", "어둠에 있는 자"(19절), "어리석은 자", "어린아이"(20절)를 이끌 자격은 자신들에게밖에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바울은 이들에게 통렬한 꾸짖음을 내린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21절) 바울은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죄인임을 깨닫게 한다. 그들의 말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도둑질하고(21절) 간음하고 우상의 능력을 믿는 ..
바울은 본문에서 "의로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의로움은 무엇인가? 그저 율법을 듣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것이다(13절). 이는 율법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 의로워졌다고 믿는 '선민' 유대인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율법을 아는 사람이 범죄하였다면 그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고, 율법을 모르는 사람이 범죄하였더라도 그 나름 심판을 받을 것이다(12절). 바울은 이 명제가 조금 빈약하다고 느꼈는지 율법을 모르는 사람의 경우를 더 설명한다.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된다(15절). 그들은 율법이 "그 마음에 새"겨져 있으므로(15절)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수 있다(14절). 이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알고 있다는 전제를 그 배경에 깔고 있다. 어..
5절은 지난 본문에서 이어지는 구절이다. 지난 본문에서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사람"(롬 2:1) 역시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이야기했다. 회개를 한다 하여도 그것은 내 공로가 아닌데(롬 2:4), 회개조차 하지 않는다면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5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고집을 피우며 진노를 쌓고 있다(5절).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려고 함정을 파두신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의로우신 분이다(6절). 바울은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는 각 사람"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설명한다.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생"과 더불어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주어질 것이다(7, 10절).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가 임할 것이요, ..
이전 본문까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롬 1:18)의 죄악상을 낱낱이 고발한 바울은, 갑자기 그 포문을 '우리'에게로 돌린다. 아마 로마 교인들은 로마서 1장을 읽으면서 주위의 이교도들을 판단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1절)라니, 이 무슨 날벼락인가?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 올무가 된다고 논한다. 우리는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인지 알지만, 죄악 가운데 있는 자들과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1, 3절). 우리라고 심판을 피하겠는가(3절)? 그들과 같은 일을 행한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이루어질 것이다(2절). 혹시 우리가 회개한다면, 그것 역시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여 회..
지난 본문에서 "복음"에 대해 말한 바울은 그 복음의 필요성에 대해 기나긴 논증을 시작한다. 바울의 이야기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된다(18절). 이들은 아마 로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교도들이었을 것이다. 본문에 따르면 그들은 이방 신을 섬기는 사람들(23절)로 비윤리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24절).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을 계시하셨다(19절).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20절). 하나님은 원래 보이지 않는 분이고, 그 분의 능력과 신성은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인간에게 계시하기로 작정하셨고, 특별히 창조를 통하여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셨다. 본회퍼의 표현대로 "성숙한 세계"를 살아가는 과..
바울은 스스로를 "빚진 자"로 규정한다(14절). 이는 복음 전파의 의무를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그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은 헬라인, 야만인,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 등 인간의 분류를 뛰어넘는다(14절). 따라서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15절).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의 목적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것(16절)으로, 그 내용은 "믿음"과 "의"이다(17절). 바울이 여기서 복음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강조하고 있음에 주목하자. 지난 큐티와 이어서 생각해 볼 때, 이 본문은 상당히 흥미롭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복음"을 전하고 싶어한다. "교회"가 "복음"을 몰랐던 것인가? 날샘은 로마 교회가 처음엔 복음을 받았지만 핍박 때문에 확신을 잃었기에 다시 복..
오늘 본문은 바울이 로마 교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바울은 먼저 로마 성도들의 믿음을 인해 감사한다(8절). 바울은 이들을 위해 항상 기도했다(9절). 그는 그 증인으로 하나님을 내세울 정도로 떳떳했다. 이로부터 바울이 아직 로마 교회를 방문하지 않았음에도 항상 로마 교회를 마음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로마 교회를 직접 방문하길 원했다(10절). 이는 그가 "어떤 신령한 은사"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함이었는데(11절), 바울은 자신이 방문하여 은사를 나누어 주면 그들이 "견고하게" 되며(11절) "열매를 맺게" 될 것(13절)이라고 말한다. 또한, 바울의 믿음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만큼 그들의 믿음이 바울 자신에게도 안위함을 줄 것이라고 기대한..
4월에는 로마서를 묵상한다. 본문은 편지의 서두로서 수신인과 발신인을 밝히고 있다. 발신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다(1절).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사람으로 소개한다(1절). 즉, '복음'을 위해 '사도'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어 이 각각에 대해 부연한다. 그는 먼저 복음에 대해 부연하기를 "그의 아들"에 관해 성경에 약속된 것이라 말하는데(2절), 그 아들은 다윗의 혈통(3절)이자 하나님의 아들(4절)로서 "우리 주"(4절)이시다. 그렇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다. 그렇다면 '사도'란 무엇인가? 바울은 자신의 직분을 일컬어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는 직분이라고 말한..
오늘 본문에서는 노사도의 인간적인 외로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9절)며 겉옷과 책을 가져올 것을 부탁한다(13절). 옥중에서 떨며 고독해 하는 바울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가. 바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누가를 제외하고 전부 바울을 떠났다(11절). 그 중에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난 사람도 있었고(10절), 바울이 선교를 위하여 이곳저곳으로 파송한 사람들도 있었다(10, 12절). 바울은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이 많이 생각났던 모양이다. 16절에서 그는 첫 변론 때 함께 했던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다고 말한다. 아예 바울을 적대한 사람도 있었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해를 많이 입혔"다고 한다(14절). 자신에게 아픔을..
어째서 날샘이 본문 구분을 이렇게 해놓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12절은 이전 본문에 붙여 놓는 것이 좀 더 해석을 용이하게 해준다. 따라서 12절은 이전 본문의 맥락에서 해석하도록 하겠다. 12절은 이전 본문에서 논의된 "고난"과 "부끄러움"의 문제를 계속 다룬다. 이전 본문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면, 복음은 그 자체가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설사 그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12절에서 바울은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뢰를 이야기한다. 바울은 자신이 누구를 믿는지 알고 있고, 그 분이 마지막 날까지 자신의 신뢰를 지켜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고난 앞에서 당당할 수 있..
어째서 날샘이 서로 무관해 보이는 두 본문을 묶어서 오늘 본문으로 삼았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날샘의 구분에 따라 오늘 본문을 묵상한다. 오늘 본문은 디모데에 대한 명령(18-20절)과 기도에 관한 가르침(1-7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디모데에게 주는 명령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명령의 권위이다.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18절) "이 교훈"은 앞선 본문들(딤전 1:5, 11)에서 나왔던 교훈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의 복음을 따르는, 사랑을 목적으로 하는 교훈이다. 이 교훈에 근거하여 바울은 디모데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 다음으로 바울은 무엇에 기반하여 행할 것인지 말하고 있는데,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18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에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고..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율법의 가치에 관하여 가르침을 베푼다. 이는 이전 본문에서 율법을 부정적으로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딤전 1:6-7) 과연 율법의 선생이 되는 것은 나쁜 일인가? 바울은 8절에서 율법은 선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붙는다.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8절) 즉 이 문장 안에는 앞서 언급한 헛된 말에 빠진 사람들이 율법을 적법하게 쓰고 있지 않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율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다(9절). 율법은 악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바울은 악한 사람의 목록을 쭉 열거하고 맨 끝에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언급하는데(10절), 이..
이 글은 동성애 논란에 엮인 글임. 나는 동성애자들이 교회 내에서 당하고 있는 고난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바이며, 현대 교회가 때론 성경을 왜곡하여 동성애를 핍박해왔다는 데에 동의한다. 하지만 과연 이 강연에서 이야기하는 성경 해석이 정녕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앞으로 제기할 의문은 철저히 성경해석학 및 조직신학의 범위 내에 있는 질문일 뿐이며, 동성애자들에 대한 공격/박해와는 별개의 문제임을 분명히 한다. 주어진 텍스트를 해석하는 작업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특히 성경과 같이 오래 전에 쓰여져서 현대의 시각에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텍스트는 더욱 그렇다. 이에 관하여 나는 복음주의자로서 성경의 영성을 무시하는 자유주의에도 반대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성경에 대한 문자적 ..
내 입장과는 별개로, 생각해 볼 만한 좋은 강연인 것 같아서 여기 소개한다. 아래의 한글 요약은 내가 한 것이며, 인용하는 성경은 개역개정을 기준으로 하였다. 이에 대한 내 코멘트는 별도의 글로 달도록 하겠다. 1. 전통적인 성경 해석에 따르면 동성애자들은 문제 있는 사람들이고, 죄를 범한 자들이며,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해석에 기반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들을 억압하고 박해한다. (최소한 심정적으로 이질감을 갖는다.) 2. 하지만 전통적인 성경 해석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2-1. 마태복음 7장(산상수훈 일부)에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나는 예전부터 그런 기도를 하곤 했다. "내 생명을 취하시더라도 여자친구가 구원 받는다면 드리겠습니다." 얼핏 보면 대단한 신앙의 고백이요, 순교자의 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그러한 나 자신을 뿌듯하게 여겼고, '왜 이런 기도를 하는데도 주님은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걸까?'라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오늘 대학부 예배 중에 을 부르게 되었다. 찬양하는 중에 갑자기 주님이 이렇게 물으시는 것 같았다. "얘야, 네 생명은 됐고, 네가 매일 두 시간씩 떼어서 기도할 때 그걸로 여자친구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네 시간을 나에게 줄 수 있겠니?" 머뭇거려졌다. '내가 그냥 칵 죽어버린다면 그건 드릴 수 있겠는데, 삶을 살면서 그 일부를 드리는 건...' 주님의 물음은 이어졌다. "만약 네가 그렇게 애지..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최근 이 구절이 계속 머리에 맴돈다. 한 구 한 구가 정말 기독교 신앙의 정수라는 느낌이 든다. 이 구절을 한 구씩 읽어나가며 묵상한 것을 나누고자 한다. 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위대한 "성육신"을 담고 있는 구절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같은 분(요 1:1)이었으나 스스로를 낮춰 "육신"이 되셨다. 이를 신학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 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
어제는 추수감사절이었다. 대예배에서 기도를 하는데, 문득 나는 왜 이렇게 힘든 건지 왜 이렇게 무능한 건지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확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 고생 없이 편하게 신앙생활하고, 어떤 사람들은 고생은 좀 해도 신비한 체험을 하며 주님을 만나는데, 나는 왜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저 고생만 하고 있는 걸까 싶더라. 그런데 그 순간 마음에 떠오른 말씀이 있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이 말씀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내가 절망적인 죄인일 때에 나를 위해 죽으셨고(롬 5:8),..
'죄'란 무엇인가? 추상적으로 설명하기는 쉽다.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자기 주장 의지 등으로 설명하면 되니까. 그런데 특정 행동이 죄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특히 요즘 같이 교회가 다양화된 시대에는 어떠한 행동이 죄인지 명확하게 단정하기 힘들어 보인다. 일례를 들어, 일요일에 음식을 사먹는 것은 죄인가? 보수적인 교회에선 이를 죄라 규정하고 꺼리는 반면, 그렇지 않은 교회들도 있다. 술을 먹는 것은 죄인가? 혼전순결을 깨는 것은 죄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우리는 무어라 답해야 할까?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은 이와 비슷한 문제를 다룬다. 당시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한 부류는 열광주의자(enthusiast)로,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것이..
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3-4) 이 구절에서 두 가지를 발견했기에 메모해둔다. 1) 우선 이 구절은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일전에 예수가 메시아임에 대한 증거라는 글에서 예수가 메시아인 것이 어떻게 확증되었는지를 논한 바 있는데, 본문이 그에 대한 대답으로 어느 정도 인정받을 수 있겠다. 바울이 부활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사건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면 김세윤 교수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는 거니까. 2) 또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웨인 그루뎀의 26장에서 그리스도의 위격을 논하는데, 특히 인성과 신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