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요한복음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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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선언한다(14절). 따라서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직 사망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14절), 심지어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것과 같다(15절). 살인자 안에서 영생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14절은 다소 해석이 필요한데, 요한일서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cf. 요일 5:13). 도리어 이 구절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자가 나타낼 모습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 하다.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는 자연스레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인용하여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을 아는 자라면 마찬가지로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게 된다고까지 말한다(16절). 이는 요 15..
사도 요한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계를 내린다. 여기서 "적그리스도"는 흔히 생각하는 마왕이 아니라 잘못된 가르침을 베푸는 교사들을 가리킨다. 18절은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다고 말하고, 이들이 발흥하는 것을 보면 마지막 때가 왔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19절은 그 적그리스도들이 결국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임을 증언한다. 사도 요한은 이들이 나간 것을 보면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20-21절에 걸쳐 사도 요한은 독자들을 권면한다. 독자들은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알게 된 자들로서(20절), 진리를 알고 있다(21절). 이 "기름 부음"은 요일 2:27를 참조할 때,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너희에게 쓴다는 표현을 한 번 더 한다(1절). 여기서 "이것"은 아무래도 그 앞, 즉 1:5-10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듯 싶다. 해당 구절에서 요한은 빛과 어둠이라는 언어를 사용해 죄를 떠날 것을 권면했는데, 1절에서는 그것을 조금 더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지만 우리가 완전한 것이 아니기에 죄를 범할 수도 있다. 요한은 죄를 범하여도 우리에게는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며(1절) 그는 우리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화목 제물로 드려지셨다고 증언한다(2절). 이 내용 역시 지난 본문에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쳐야 하지만, 그럼에도 육신이 약하여 죄를 범하게 된다. 그 때 성도들은 그리스도..
다윗은 모든 지휘관과 함께 의논하여(1절)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기로 결정하였고(2-3절), 이는 백성들의 동의를 얻었다(4절). 다윗은 모든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가져온다(5-6절). 궤를 수레에 싣고 오면서(7절) 다윗과 이스라엘은 그 앞에서 찬양했다(8절). 하지만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자 소들이 뛰었고, 웃사가 궤를 잡자(9절) 그는 그 곳에서 바로 죽었다(10절). 다윗은 이를 보고 두려워하여 더 이상 궤를 옮기지 않고(11-12절)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다(13절). 이 일로 인해 오벧에돔은 복을 받았다(14절). 오늘 본문은 병행구인 삼하 6:1-11과 함께 읽으면서 비교한다. 먼저 맥락을 살피자면, 사무엘하에서는 다윗이 즉위한 이후 블레셋과의 전투..
예수께서는 이제 제자들에게 당신의 고난와 부활을 예언하신다(21절). 베드로는 이에 반발하나(22절) 예수께서는 그를 꾸짖으신 후(23절), 제자도에 대해 가르치신다(24-28절). 오늘 본문의 첫 주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21절). 십자가의 죽으심은 단순히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 즉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의 사역임을 언급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는 예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실 때 하신 말씀과도 연결된다. 예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일"로서 중요한 것이었다(23절).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 꼭 있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라면 자신의 목숨을 아쉽게 생각하지 않는다(24절). 이는 눈에 보이는 삶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자는 결국 멸망할 것이요, 그 삶을 기꺼이 예수를..
예수께서는 맹인 두 명의 간청을 듣고(27-28절) 그들의 눈을 만져(29절) 낫게 하셨다(30절). 그들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퍼뜨렸다(31절). 또한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도 예수 앞에 오자(32절) 귀신이 나가고 치유되었다(33절). 무리는 이를 보고 놀랍게 여겼지만(33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비방하였다(34절).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가르치고 전도하고 치유하는 사역을 곳곳에서 하셨다(35절). 오늘 본문은 절묘하게 구성되어 있다. 우선 첫 번째 기사의 맹인은 두 명이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하냐면, 율법에서 규정한 증인의 최소 인원수가 둘이었기 때문이었다(신 19:15). 이 맹인들은 (예수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예수의 소문을 사방에 퍼뜨렸다(31절). 마태가 이들이 두 명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위협을 당하고 풀려난 사도들은 교회 공동체로 와서 그 말을 전한다(23절). 공동체는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24절). 그들이 드린 기도를 살펴보자면, 먼저 구약의 하나님이 자신들의 하나님임을 분명히 하였고(24-26절) 구약의 예언(시 2:1-2)대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가 핍박을 당함을 고백하였다(27, 28절). 그들은 그 핍박 속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께서 신유와 표적, 기사를 이루어주시도록 기도하였다(29, 30절). 그러자 그 기도가 응답되었고, 그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31절). (29절은 "μετὰ παρρησίας πάσης λαλεῖν τὸν λόγον σου"라고, ..
어젯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이, 사도 바울이 우리 교회에 와서 직접 설교를 한다면, 과연 나는 무슨 반응을 보일 것인가? "아이 참, 저 양반은 무슨 얘기를 저렇게 어렵게 해? 저렇게 얘기해서 사람들이 이해하겠어?"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0, 66) "어째 저리 말이 비리비리하냐. 설교자가 복음에 확신이 없나?"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고후 10:10, 12) 나의 귀..
아이 성의 백성들이 패주하는 이스라엘을 쫓아 성을 비우고 몰려나오자(수 8:16-17), 이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복병에게 신호를 주라고 명하신다(18절). 복병은 바로 일어나 성읍을 점령했고(19절), 패주하던 이스라엘 백성도 돌아서서 아이 군대를 쳤다(20-21절). 사이에 낀 아이 백성은 혼란에 빠져 멸망해 버렸고(20, 22절), 아이 왕마저 사로잡혔다(23절). 이번 본문에서 눈이 가는 부분은 전쟁을 이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앞선 아이 성 공격에서 하나님의 성호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수 7:2-5)과는 대조적으로, 오늘 본문은 복병에게 신호를 주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18절). 하나님께서 참전하셨기에 이 전투는 승리할 수 밖에 없는 전투였다. 하나님..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내려주신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다시금 되새기는 데서 시작한다(2절).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셨으니 이제 너희는 이 계명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은 당신 외에는 그 무엇도 섬기지 말라고 엄하게 말씀하신다(3-5절). 하나님 외의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고(5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6절).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하나님은 그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하신다(7절).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 뭘까? 성경에서 같은 단어(לַשָּׁ֑וְא)가 사용된 가장 비슷한 곳은 시 139:20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완전히 떠났다. 하나님은 이들을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17절)로 보내는 대신 "홍해의 광야 길"(18절)로 인도하셨는데, 이는 전쟁을 피하기 위함이었다(17절). 그들이 광야에 들어서자(20절) 하나님은 "그들 앞에서 가시며" 그들의 행로를 인도하셨고(21절),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늘 그들과 동행했다(22절).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하나님과 동행한다. 모세는 요셉의 유언을 기억하고 애굽을 빠져나올 때 "요셉의 유골"을 지니고 나왔다(19절). 본문에 인용된 요셉의 유언 역시 의미심장하다. 본래 창세기에서는 요셉의 유언을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창 50:25)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
계속해서 세상사에 대한 예언이 주어지나, 이번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에 조금 더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다. "북방 왕"은 "거룩한 언약"을 거스른다(28절). 그는 자신의 패배(29-30절)를 "거룩한 언약"의 탓으로 돌리며(30절)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31절)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시킬 것이다(32절). 비록 이 본문이 역사적으로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가리킬지라도, 악을 따르는 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미워할 것이다. 예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
삼위일체 교리를 접할 때마다 마음 한 켠에 불편함이 있었다. 성부와 성자의 동일성은 성경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성자와 성령의 동일성은 간접적인 형태 이외에 증거하는 구절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박희원 목사님께 여쭈어 보았을 때는 요한복음 14-16장이 명백하게 증언하고 있다고 답해 주셨는데, 나에게는 그 본문의 증거가 그리 명백해 보이지 않았다. 오늘 성경을 묵상하던 중에 조금 더 성자와 성령을 일치시킬 수 있는 본문을 찾았다. 24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3:24) 이 본문은 마치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를 주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최근 이 구절이 계속 머리에 맴돈다. 한 구 한 구가 정말 기독교 신앙의 정수라는 느낌이 든다. 이 구절을 한 구씩 읽어나가며 묵상한 것을 나누고자 한다. 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위대한 "성육신"을 담고 있는 구절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같은 분(요 1:1)이었으나 스스로를 낮춰 "육신"이 되셨다. 이를 신학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 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자유케 하니 주 앞에 나 예배하는 이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 주의 손 날 위해 찢기셨고 주의 발 날 위해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를 위해 사는 것이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오늘 대학부 예배 시간에 부른 곡.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라는 가사에서 눈물이 났다. 주께서 "인간"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니 나 또한 주를 따라 그 "인간"을 위해 십자가를 ..
구약성경을 읽다가 재미있는 구절을 하나 발견했기에 포스팅으로 남긴다. 42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3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 (왕하 4:42-44) 선지자 엘리사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보리떡 20개와 채소를 가지고 100명이 먹고 남은 사건. 딱 들으니까 무언가 떠오르지 않는가? 그래, 오병이어 사건! 이 사건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복음서의 기자들이 한 명도 빼놓지 않고 ..
김세윤 교수의 3장에서 필자는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인 것을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선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 제자들이 그를 메시아로 믿었다는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의 입장을 인용하고 그 입장을 반박한다. 구약이나 당시 유대 문서에는 메시아의 부활 사상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김 교수는 이에 대한 답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한다. 1) 예수는 삶과 메시지를 통해 자신이 '죽기 위한' 메시아임을 드러냈다. 2)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로써 예수는 자기 성취를 이루었으나 그 죽음이 참된 것인지 알 길은 없다. 3) 예수가 부활했다. 부활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이 예수의 말을 확증한 것이다...
김세윤 교수의 를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가리켜 메시아나 그리스도라 직접적으로 일컫지 않고 "인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아나 그리스도라 하면 정치적 해방자를 떠올리는 경향이 있었기에 그걸 막기 위해서 다른 표현을 우회적으로 사용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다음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5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요 4:25-26)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복음서에는 이런 구절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한 가..
10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마 17:10-13) 11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8) 대학부 9/13 설교에서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더불어 평안함의 상징으로,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멸망한 조국을 보며 (정치적인) 메시야가 도래해 조국에 평화를 가져다 주리라 믿으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였다. (포도나무는 그 아래에서 기도하기에 불편하였기 때문에 주로 무화과나무가 기도처로 선택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본문은 나다나엘이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는 경건한 유대인이었음을 나타내며, 예수님이 그의 기도를 보셨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