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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지도자들에게 위협을 당하고 풀려난 사도들은 교회 공동체로 와서 그 말을 전한다(23절). 공동체는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24절). 그들이 드린 기도를 살펴보자면, 먼저 구약의 하나님이 자신들의 하나님임을 분명히 하였고(24-26절) 구약의 예언(시 2:1-2)대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가 핍박을 당함을 고백하였다(27, 28절). 그들은 그 핍박 속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께서 신유와 표적, 기사를 이루어주시도록 기도하였다(29, 30절). 그러자 그 기도가 응답되었고, 그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31절). (29절은 "μετὰ παρρησίας πάσης λαλεῖν τὸν λόγον σου"라고, ..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완전히 떠났다. 하나님은 이들을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17절)로 보내는 대신 "홍해의 광야 길"(18절)로 인도하셨는데, 이는 전쟁을 피하기 위함이었다(17절). 그들이 광야에 들어서자(20절) 하나님은 "그들 앞에서 가시며" 그들의 행로를 인도하셨고(21절),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늘 그들과 동행했다(22절).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하나님과 동행한다. 모세는 요셉의 유언을 기억하고 애굽을 빠져나올 때 "요셉의 유골"을 지니고 나왔다(19절). 본문에 인용된 요셉의 유언 역시 의미심장하다. 본래 창세기에서는 요셉의 유언을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창 50:25)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최근 이 구절이 계속 머리에 맴돈다. 한 구 한 구가 정말 기독교 신앙의 정수라는 느낌이 든다. 이 구절을 한 구씩 읽어나가며 묵상한 것을 나누고자 한다. 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위대한 "성육신"을 담고 있는 구절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같은 분(요 1:1)이었으나 스스로를 낮춰 "육신"이 되셨다. 이를 신학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 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
10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마 17:10-13) 11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8) 대학부 9/13 설교에서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더불어 평안함의 상징으로,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멸망한 조국을 보며 (정치적인) 메시야가 도래해 조국에 평화를 가져다 주리라 믿으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였다. (포도나무는 그 아래에서 기도하기에 불편하였기 때문에 주로 무화과나무가 기도처로 선택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본문은 나다나엘이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는 경건한 유대인이었음을 나타내며, 예수님이 그의 기도를 보셨다는 것..
그루뎀은 자신의 조직신학 책 19장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 중에는 성자 예수님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천사가 종종 자신을 하나님으로 칭하였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피조물에 불과한 천사가 자신을 하나님으로 칭할 수는 없기에,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그 자리에 끼워 넣은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논증은 성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속성과 천사의 속성을 '먼저' 정의하고 그로부터 이성을 사용하여 이와 같은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철학적 신학 논증이라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중세 신학의 잔재일지도?) 우선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우선 유명한 장면을 살펴보자.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에서가 기..
지난 주에 목사님께서 요한복음 1장을 강해하시면서 제자들이 자신의 친구들을 '전도'한 말은 그저 "와서 보라.(Come, and you will see.)"였다는 말씀을 하셨다. 복잡한 논증을 늘어놓거나 자신의 체험담을 열정적으로 떠드는 대신,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해보라고 권했다는 것이다. 순간 깨달았다. 우리는 '전도'를 자꾸 '설득'으로 생각한다. "기독교는 XXX해서 옳아. 그러니까 믿어." "내가 믿어보니까 XXX가 좋더라. 그러니까 믿어." 그런데 성경에 나타나는 전도는 그런 게 아니었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봐. 그럼 알게 될 거야." 이것이 우리의 올바른 전도 방식 아닐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 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