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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11:1-5 본문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서 어젯밤에 읽었던 <복음과 상황> 4월호 커버스토리가 계속 겹쳐 보였다. "알고 보면 세속적인 목회자들의 욕망"이라는 제목을 달고 그리스도인과 욕망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사들이었는데, 참... 작금의 상황과 겹쳐서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암몬 자손과 전쟁하던 시기에 벌어졌던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의 시작 부분을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암몬 자손을 공격한 끝에 수도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다(1절). 다윗은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2절) 흥미가 동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본 후(3절) 불러들여 동침한다(4절). 결국 이 여인은 임신하게 되었다(5절).
오늘도 날샘과 박희원 목사님에게 반역하는(!) 큐티를 해볼까 한다. 1절에 묘사된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는 말이 다윗이 죄를 짓게 된 동기를 설명하는 것일까? 이는 그저 사건이 일어난 시간적/공간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 앞서 10장에서도 다윗은 자기는 출진하지 않은 채 요압과 군대를 보내어 암몬 자손을 공격하게 했기 때문이다(삼하 10:7). 다윗의 이러한 태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었나?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스라엘이 완전한 승리(삼하 10:13-14)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본문은 담담한 필체로 다윗이 죄를 범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욕정을 느꼈고(2절), 여자에 대해 알아본 후(3절) 죄를 범했다(4절). 이 과정에서 2절에서 사용된 동사 하나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윗이 ... 보니 ..." 이 "보다(רָאָה)"라는 동사는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보았다"고 할 때(창 3:6)도 사용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았다"고 할 때(창 6:2)도 사용된 동사이다. 즉, 인간의 욕망이 발현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질 때 쓰이는 동사인 것이다.
<복음과 상황> 기사들도 언급하고 있지만, 욕망 자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하신 것이다. 성욕 역시 마찬가지다. 성욕은 자손을 번성케 하고 부부가 사랑을 나누게 하는 귀한 욕구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그 욕구를 빌미로 죄가 틈을 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다윗은 자신의 욕구를 틈타 "죄가 그를 원할 때" 그 죄를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도리어 죄에 다스림을 받게 되었다. (본문 1절을 떠올려 보면 이스라엘이 암몬 자손에 대해 승리하는 동안 다윗은 죄에 패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절묘한 대조인가!)
나의 삶을 돌이켜 보아도, 욕망의 계기가 주어질 때 그 욕망이 죄로 발전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다. 간단한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예기치 않게 음란물 링크를 마주치게 된다. "음란죄가 나를 원할 때"이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그것을 클릭하여 내 욕구를 죄악으로 발전시키는 순간이다. 그 순간, 죄가 나를 다스리게 되고, 나는 패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욕구들을 죄악으로 발전시키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육신을 제어하길 원한다. 때때로 찾아오는 유혹의 순간에 성결케 하시는 영이신 성령께서 나를 붙드시고 지켜주시길 간구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