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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2:15-2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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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2:15-21

로보스 2016. 9. 6. 05:19

지난 묵상을 올린 지 석 달이 지났다. 그 사이 결혼도 했고, 새로운 직업도 얻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말씀 묵상을 소홀히 했던 것을 반성하며, 이제 9월 첫째 주부터 다시 말씀 묵상을 정리해서 올려보고자 한다. 우선 오늘 본문은 짤막하게 잡았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알고 "거기"를 떠나가셨지만, 사람들은 그를 따랐다(15절).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치시고(15절)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다(16절). 이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다(17-21절).


오늘 본문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바리새인과 예수를 따르는 무리이다. 바리새인은 예수를 죽이려 했고(마 12:14), 무리는 예수를 따랐다(15절).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으로부터는 떠나가셨지만, 무리에게는 긍휼을 베푸셔서 병을 고쳐주셨다(15절).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예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바리새인처럼 내 생각으로 예수를 재단하고, 내 생각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 그를 거부하는가? 아니면, 무리처럼 그가 내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순전하게 따르는가? 예수께서는 후자를 받으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16절). 마태는 여기서 이사야 예언을 인용한다(17-21절). 이사야 본문은 이렇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 42:1-4)


마태는 이 예언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어떤 부분이 예수와 일치하는가? 예수는 바리새인과 싸우기보다 그들을 떠나기를 선택하셨다(15절). 이를 마태는 구약 본문을 약간 변형하여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라는 표현으로 묘사한다(19절). 예수는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치셨다(15절). 이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는 메시아의 모습과 일치한다(20절). 무엇보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19절)라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비록 예수가 놀라운 기적을 베풀었지만, 세상은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는 그가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16절; 19절).


흥미로운 것은, 이 예언 가운데 "이방"의 구원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본문의 18절과 21절에서 "이방"이 두 번 언급되는데, 이를 통해 예수가 "이방"을 구원할 존재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는 마태복음이 상당히 유대인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을 볼 때 특이한 점이 아닐 수 없다. 한 가지, 구약 본문은 두 번째 "이방"을 "섬들"(사 42:4)이라고 썼는데, 이를 마태의 왜곡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70인역 헬라어 역본에서 이미 "이방"(ἔθνος)이라는 표현으로 번역해 두었음을 상기하고자 한다. (물론 신학적으로도 두 개념이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는 것을 쉽게 보일 수 있다.)


예수는 누구인가? 마태는 오늘 이사야 예언을 통해 예수가 어떠한 분이신지 고백하고, 동시에 당시에 일어난 일을 병행 보고하여 그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보인다. 예수는 하나님이 택한 자(18절)로서, 그를 적대하는 자들과는 싸우지 않지만(19절), 대신 연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분(20절)이다. 그는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지만(19절), 이방의 구원이 되실 것이다(18, 21절). 나는 그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긍휼을 구하며 겸손히 그를 따르는가, 아니면 그를 판단하고 적대하는가. 주여, 긍휼을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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