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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8:9-18 본문
오늘 본문은 어제 본문과 나눠서 볼 성격이 아닌 것 같은데... 오늘 본문 역시 어제와 마찬가지로 다윗의 승승장구를 그리고 있다. 하맛 왕 도이는 다윗에게 선물을 가지고 와 화친을 청하였고(9-12절), 에돔은 다윗의 발 앞에 굴복한다(13-14절). 다윗의 왕국은 든든히 서고(15절), 그 내각은 짜임새 있게 조직되었다(16-18절).
9-14절은 어제 본문과 연속적인 내용이므로 나는 15절에 집중하여 묵상하기로 했다. 거듭된 승리로 외치를 성공적으로 이룩한 다윗은 내치에도 눈을 돌린다. 특히 그는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다. 구약 성경을 잘 읽어보면 이 두 단어는 많은 경우에 같이 붙어나온다. 유명한 아모스 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에서 정의와 공의가 함께 나오고, 욥 8:3, 시 99:4, 시 106:3, 잠 21:3, 전 5:8, 겔 45:9 등에서도 정의와 공의는 세트로 붙어다닌다. 그런데 도대체 두 단어는 어떻게 다른 걸까?
정의(히브리어 מִשְׁפָּט)는 본디 "재판"이라는 단어이다. 즉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공명정대함을 이야기한다. 이 개념은 출 23:1-3에 잘 드러나 있다. 흥미롭게도 출 23:3에서는 가난한 자라고 해서 무조건 편을 들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정의"의 개념이다. 한편, 공의(히브리어 צְדָקָה)는 "올바름", "의로움"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이 경우에는 윤리적인 올바름, 예를 들어 약한 자에 대한 신원을 포함한다. 두 단어가 잘 사용된 용례로 시 72:2를 들 수 있다.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백성은 불편부당하게 공의로 재판하되, 가난한 자들에게는 정의를 베풀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윗이 베푼 정의와 공의는 온전한 것이었던가? 이후 성경에서 다윗이 행한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다. 그는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음모를 꾸며 충성스런 장군이었던 우리아를 죽인다(삼하 11장). 이는 정의도, 공의도 아니다. 이렇게 불완전하게 등장했던 정의와 공의는,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서 "그 나라"의 가치로 등장하게 된다(렘 33:15, 사 32:1). 그렇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사 당신의 나라를 회복시킬 그 날, 정의와 공의는 온전한 형태로 우리 앞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나는 주님께서 베푸실 정의와 공의를 사모하는가? 불의와 죄악이 넘실대고 있는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와 그 의가 임할 것을 놓고 간절히 구하고 있는가? 불의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통 받으며 오직 정의와 공의가 선포될 그 날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주님, 이 참담한 세상 속에 당신의 의를 속히 보이소서.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계 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