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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7:1-6 본문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비판에 관한 가르침(1-5절)과 무지한 자를 대하는 법(6절)이다. 이 두 가지는 흥미롭게도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타인'을 대하는 두 가지 관점을 소개한다. "형제"와 "개"/"돼지"가 그것이다. "형제"는 비판하지 말고, "개"/"돼지"에게는 접근하지 말라. 맥락에 잘 맞지 않는 것 같은 6절이 여기 삽입된 이유는 이 두 관점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먼저 비판에 관한 부분은 이해하기 쉽다. 내가 비판을 한다면 동일한 잣대가 나에게도 적용된다(1-2절). 그런데 이 '동일한 잣대'는 동일한 규범이라는 의미라기보다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로 보인다. 3-5절을 보면 나와 형제의 잘못이 "들보"와 "티"처럼 다르다고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악한 일은 깨닫지 못한 채, 다른 이의 잘못만을 지적하는 것을 주님께서 질타하신다.
6절에서 이야기하는 "개"와 "돼지"는 누구일까? "원수"와 "박해하는 자"조차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마 5:44)께서 이렇게 강경하게 이야기하시는 대상은 누구일까? 나는 이들을 초대 교회 공동체의 상황에 대입해 볼 때 교회를 분열시키고 거짓 가르침을 베풀던 이단이 아닌가 싶다. 이들에게 참된 가르침, 즉 복음을 말해준다 해도 그들은 그것을 "발로 밟고" 도리어 나를 공격할 것이다. 따라서 상종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cf. 마 18:17).
우리는 다른 이를 내 기준을 가지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동시에 진리가 오염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내 기준"과 "진리"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신의 기준을 진리라고 말하며 다른 이들을 정죄하기에 바쁘고, 어떤 이들은 세상에 진리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게 다 나의 잣대라며 복음의 절대성을 부인한다. 하지만 나는 그 중간 어디쯤이 옳은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복잡하다.
다른 이들을 대하는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나는 "외식하는 자"가 아닌가. 나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자가 아닌가. 잘 모르겠다. 주여, 내 눈 안의 들보를 보게 하시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