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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6:16-18 본문
세 번째 "의"가 등장했다. 이번에는 금식이다. 외식하는 자들은 금식할 때 얼굴을 흉하게 하여 자신이 금식 중임을 알렸다(16절).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이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금식할 때 올바른 자세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용모 단정하게 금식하는 티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명하신다(17절). 이는 금식을 하나님께만 알리기 위함이다(18절).
성경에 등장하는 금식은 많은 경우 기도와 결부되어 있다(느 1:4, 단 9:3, 눅 2:37; 5:33, 행 13:3; 14:23). 그리고 금식은 즐거움을 끊는 행위로 간주되었다(사 58:3-6). 즉, 육신의 욕망을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하며 부르짖는 것이 금식의 본디 목적인 것이다. 바벨론 포로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됨의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금식 절기를 만들었다(슥 7:5; 8:19, 행 27:9).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매주 금식하는 날을 정해서 기도에 집중했다(눅 18:12).
문제는, 이렇게 시작된 금식일 규정이 자기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8장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금식하는 것을 자랑처럼 하나님 앞에 내놓는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비판하시는 "외식하는 자들" 역시 금식을 다른 이들 앞에서 자신의 종교성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기 때문이다(16절).
신앙 생활을 하면서 참 많은 "행위"들이 있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모든 행위들이 다 처음 만들어질 때에는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마치 신앙심을 증명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첫 의도는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주일 성수가 그러한 것일 테고, 예배의 많은 요소들이 그러한 것일 터이다. 새벽기도와 식기도도 그렇다. 과연 나는 그 의미를 새기면서 "행위"에 참여하고 있는가.
본문은 당시 중요한 종교적 행위였던 "금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이 안에 담긴 예수의 메시지가 모든 종교적 행위로 확장 가능하다고 본다. 사람들이 보건 보지 않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행위를 보고 계신다. 만약 나의 행위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무엇 있겠는가? 나의 신앙 생활을 돌아보고, 하나님께로만 다시 마음을 맞출 수 있도록 노력하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