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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2:41-44 본문
예수께서 성전에 계실 때에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신 후 헌금하는 사람들을 보셨다(41절). 나는 마가가 이 본문을 시작할 때 예수의 행동을 언급한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이 '앉는다(καθίζω)'는 단어가 마가가 승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할 때도 사용한 단어이기 때문이다(막 16:19). 즉, 어쩌면 마가는 예수께서 헌금함 앞에 앉으셨다는 표현을 통해 헌금함 앞에 통치자/심판주로서 심판을 내리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의미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심판주는 여러 부자(41절)와 한 가난한 과부(42절)를 보시고 판결을 내리신다.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43절) 어째서 그런가?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서 일부를 떼어 넣었지만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이다(44절).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흔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메시지를 끌어내기 쉬운데, 정말 예수(와 마가)가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의심스럽다. 부자들도 전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넣었어야 하는 것인가? 날샘은 정말 독자들이 "생활비 전부를"(44절) 헌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나는 차라리 이 본문을 인클루시오(inclusio) 기법으로 해석하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앞뒤의 본문이 과부가 가난해진 것을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본문에도 "과부"라는 단어가 등장한다(막 12:40). 서기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다. 그들이 삼킨 가산은 어떻게 되었는가? 뒤의 본문에 따르면 아름다운 돌들로 건물들을 짓는데 사용되었다(막 13:1). 누가복음에서는 건물 자체를 일러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눅 21:5)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좀 더 직접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돈이 화려한 성전을 짓는데 사용되었음을 명시한다. (누가복음도 마가복음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좀 더 큰 맥락에서 이 본문을 해석하자면, 이 본문은 가진 자들의 횡포로 수탈당한 가난한 자들이 심판주의 눈에 긍휼을 입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진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수탈하여 화려한 종교 건물을 지었지만, 이들은 결국 그 건물과 함께 다 멸망하고 말 것이다(막 12:40; 13:2).
심판주이신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세상에서 보기에 화려하고 근사한 것들이 주님 눈에는 언젠가 다 살라지고 말 헛된 것일 수 있다. 나는 본문의 부자들처럼 헛된 것을 자랑하며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본다. 나는 정녕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보고 있는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눅 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