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os credit
엡 2:1-7 본문
본문은 날샘의 해석처럼 우리의 과거 모습(1-3절)과 현재 모습(4-7절)을 비교하고 있다. 헬라어 원문을 참조해보니 1절은 NIV처럼 해석하여 과거 모습으로 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가 살리셨다는 내용은 번역 과정에서 추가된 듯. (Barnes: The words "hath he quickened," or "made to live," are supplied, but not improperly, by our translators.)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고(1절)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며(2절)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던 자들이었다(3절). 이를 가리켜 바울은 한마디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3절)였다고 딱 잘라 말한다. 즉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은 허물과 죄요,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다(cf. 롬 7:18, 벧전 2:11).
이런 아무런 소망 없는 상태에 "은혜로" 하나님의 긍휼이 임했다(4-5절). 우리는 다시 살아났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되었다(5-6절). 이 부분의 묘사에서 주목할 것은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이다. 그는 "함께 일으키사(συνήγειρεν)", "함께 앉히시니(συνεκάθισεν)"라는 동사를 사용하는데(6절), 이는 엡 1:20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시고(ἐγείρας) 앉히셨다(καθίσας)고 할 때 썼던 동사에 "함께(συν-)"라는 접두어를 붙여 만든 동사들이다. 즉 바울은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난 것과 보좌에 앉게 된 것이 예수께서 살아나신 것과 보좌에 앉게 되신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인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3절)였던 우리에게 하나님은 "은혜로"(5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동일한' 자격과 권리를 주신 것이다. 이 얼마나 크신 자비인가? 이 얼마나 값진 은혜인가? 그렇기에 바울은 이 놀라운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신지 드러내기 위한 역사였다고 말한다(7절). 마치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하나님이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분인지 보여주기 위한 사역이었던 것(e.g. 신 7:6-8)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이 죄인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하신 그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내가 되길,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육체의 욕심을 떨쳐내고 주님 말씀에만 순종하는 내가 되길 기도한다.
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날 부요케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