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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4:18-25 본문

큐티

마 4:18-25

로보스 2016. 3. 22. 23:39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를 다니시다가 물고기를 잡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를 보시고(18절) 부르시자(19절) 그들이 바로 따랐다(20절). 또한 마찬가지로 야고보와 요한 역시 고기를 잡다가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21절) 그를 따랐다(22절). 예수께서는 갈릴리 일대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지만(23-24절), 그의 소문은 온 수리아를 넘어(24절) 예루살렘, 유대, 요단 강 건너편까지 이르렀다(25절).


오늘 본문은 크게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과 예수의 소문이 퍼져가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에 나타난 마태의 치밀한 서술을 보라. 마태는 18절을 "어부"(ἁλιεῖς)라는 단어로 끝내고, 바로 다음 문장인 19절에서 그 단어를 그대로 등장시킨다. (동일한 작업을 묘사하는 21절에 "어부"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마태가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썼음을 알 수 있다.) 물고기를 잡는 일에 능숙한 어부를, 예수께서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다(19절).


우리는 흔히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표현을 단순히 전도의 사명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데, 한 번 이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마태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에,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이미 교회의 권위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부 출신으로 지적인 권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고(행 4:13), 어쩌면 그들이 지도자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교인들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바로 그들에게 사명을 주신 분이 예수임을 증언하고 있다! "어부가 어떻게 지도자를 해?" "예수께서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어." 여기에 무슨 반론을 제기하겠는가?


그리고 이들의 태도를 보라. 베드로와 안드레는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고(20절), 야고보와 요한은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다(22절). 헬라어 원문도 두 구절에서 동일한 표현을 쓴다. 부르심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예수를 따름에 있어 그들은 바로 가지고 있던 그물, 배, 아버지를 버릴 수 있었다. 베드로가 여전히 집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마 8:14), 오늘 본문이 그들이 소유를 문자적으로 다 포기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본문은 예수를 따르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이 그 본이 되었음을 주장한다.)


이제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을 보자. 23절에서 25절로 가면서 서술의 반경이 점차 확대된다. 예수께서 활동하신 구역은 온 갈릴리였지만(23절), 그의 소문은 온 수리아에 퍼졌고(24절), 급기야 갈릴리와 데가볼리 뿐 아니라 예루살렘, 유대, 요단 강 건너편에서까지 예수를 따랐다(25절). 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그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사역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것이었는데(23절), 마태복음의 다른 곳에서 예수는 이것을 메시아 예언의 성취로 언급하신다(마 11:2-5). 즉, '유대인의 왕'이 오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시작하신 것이다.


마 5:1을 볼 때, 마태는 "제자"와 "무리"를 확실히 구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섣불리 "당신은 제자인가, 무리인가?"와 같은 접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제자"인지 "무리"인지는 나의 마음가짐이나 능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는 예수께서 친히 부르사 지도자로 삼으신 자들이고(18-22절), "무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달려와 그 안에 참여하는 자들이다(23-25절). 두 부류의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 본디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어부들에게 주께서 지도자 자리를 맡기셨고, "병"과 "약한 것"에 시달리는 자들에게 주께서 회복을 선포하셨다. (25절에서 마태는 20, 22절과 동일한 표현으로 무리 역시 "그를 따랐다"(ἠκολούθησαν αὐτῷ)고 기록한다.)


왕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시작하실 때, 많은 이들이 그 소문을 듣고 나아와 고침을 받고 그를 따랐다(23-25절). 우리의 자세는 기본적으로 이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주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 수 있는 길임을 알기에 주께 나아온다. 그리고 왕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쓰시려고 제자들을 부르셨다(19절). 그러한 부르심이 내게 있다면, 본문의 제자들처럼 "곧" 내 소유를 버려 두고 주를 따라야 한다(20, 22절). 그리고 내 능력이나 태도로 인해 나를 부르신 것이 아님을 인식하고, 그저 겸손히 그가 가는 길을 따라야 한다. 서로 다른 것처럼 보였던 본문의 두 덩어리는 결국 이렇게 "주를 따르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짤막하게 하려고 했던 큐티 가운데 큰 깨달음이 있었다. 나는 주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이다. 나의 불완전함, 연약함, 추악함이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고침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자격 없는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예수를 따르자. 그 안에 나의 소망이 있기에, 그리고 그 안에 나의 소명이 있기에. 예수를 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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