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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6:18-23 본문
오늘 본문은 다윗이 법궤를 맞아들이는 제사를 지낸 후 백성을 축복하고(18절) 선물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19절). 이후 가족을 축복하기 위해 돌아온 다윗에게 아내 미갈이 다윗이 춤춘 것(삼하 6:16)을 두고 비난한다(20절).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춤춘 것이라고 말하며(21절) 더 낮아질 수도 있다고 담담히 대답하였고(22절), 그 이후 미갈은 태가 닫히는 저주를 받게 되었다(23절).
언뜻 나도 다윗처럼 춤을 출 거야! 낮아지자! 이런 결론을 내리면 딱 좋겠지만, 박희원 목사님의 구원사적 해석을 배운 이후로 다윗과 나를 동치시키는 것이 심히 불편해진 관계로 다른 큐티를 해보도록 하겠다. 다시 강조하자면, 구원사적 관점에서 볼 때 다윗은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킬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본문에서는 다윗이 왕으로서 한 일이 나와있는데, 먼저 그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복을 비는 중보자(18절)로 등장하고, 이어 백성을 먹이는 왕(19절)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모두 예수께서 실제 이 땅에 계실 적에 하셨던 일이다. 오병이어의 기적 장면만 봐도, 예수께서는 무리를 대표하여 축사하셨고, 많은 무리를 떡과 물고기로 먹이셨다(마 14장, 막 6장, 눅 9장).
그렇다면 미갈의 비난 사건은 이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오랫동안 큐티 책을 펼쳐 놓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실마리를 찾았다. 22절의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라는 구절이 그것이었다. 예수께서 "스스로 천하게 보"이신 사건이 무엇인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이다. 그는 십자가 상에서 미갈이 했던 말보다 더 악한 말을 들으셨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막 15:29-30)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막 15:31-32)
다윗은 하나님을 높이기 위하여 왕좌를 버리고 낮아지는 것을 기꺼이 감내하였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을 높이기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사 지극히 낮은 자리를 감당하셨다(빌 2:6-8). 그 결과는 무엇인가? 다윗은 미갈에게 말한다. 미갈이 이야기한 "신복의 계집종"(20절), 즉 천한 백성들은 다윗이 낮아진 모습을 보고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도리어 다윗은 그들에게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22절). 예수 역시 마찬가지다. 지극히 미련한 십자가의 도(고전 1:18)를 보고 들은 죄인들은 예수를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의 이름 앞에 절한다(빌 2:9-11).
다윗의 춤과 예수의 십자가는 이렇게 교차한다. 세상은 이를 미련하고 천박하다 생각하지만,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그 안에서 영광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영광이라고 언급하신 것이다(요 12:23). 나는 그 미련한 십자가의 도를 따르고 있는가? 하나님을 높이기 위하여 낮아지신 예수를 이스라엘이 다윗을 기뻐했던 것처럼 기뻐하는가? 문득 <춤의 왕>이라는 찬양이 떠오른다. 주의 고난을 묵상하는 이 사순절 기간에 2절 3절 가사를 다시 묵상해본다.
높은 양반들 위해 춤을 추었을 때 그들 천하다 흉보고 비웃었지만
어부 위해서 춤을 추었을 때에는 날 따라 춤을 추었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서 너 인도하련다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춤췄더니 높고 거룩한 양반들 화를 내면서
나를 때리고 옷을 벗겨 매달았다 십자가에 못박았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서 너 인도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