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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6:12-20

로보스 2014. 11. 18. 23:12

이전 본문에서 바울은 옛 사람의 습성대로 살아가는 고린도 교인들을 질책하며(고전 6:8-10)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면했다(고전 6:11). 어째서 그런가?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설명한다. 우리의 몸은 이제 성령의 전이다(19절). 예수 그리스도의 "값"으로 산 것이므로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20절).


따라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우리의 자유지만 우리는 그 자유를 스스로 제한한다(12절). 그리고 "주를 위하여" 몸을 사용한다(13절). (바울은 여기서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를 부연하기 위해 14절을 첨언한다. 주가 우리 몸을 위해 계신다는 것은, 우리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께서 먼저 사신 것이 우리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 된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다(15절). 바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창녀의 예를 든다. 창녀와 합하는 자가 그와 한 몸인 것처럼(16절) 주와 합하는 자는 주와 한 영을 이룬다(17절). 같은 맥락에서 음행은 큰 죄악이다. 바울은 음행이 자기 몸에 범하는 죄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18절). 무슨 말인가? "성령의 전"인 자기 몸(19절)을 잘못된 곳에 사용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7장에서 계속된다.)


나는 사실 간음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므로 형법상 죄가 되어선 안 된다는 논리를 접하고 이에 대한 성경적 해석이 궁금했었다. 오늘 본문은 정확히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살인, 강도, 절도는 "몸 밖"에서 짓는 죄악이다(18절). 즉 다른 이에게 피해를 끼치는 죄악이다. 반면 음행은 "자기 몸"에 범하는 죄다(18절). 합법적인 테두리를 벗어나 다른 자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형법상 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성령의 전"에 대한 죄가 된다.


나는 나의 몸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돌아본다. 물론 지금의 사회상은 바울 당시 고린도의 사회상과는 많이 달라졌고, "음행"에 대한 사회적 정의도 달라졌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내가 스스로 "성령의 전"으로서의 자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키는 대로 따라가는 것은 위험하다. 주를 위하여 내 몸을 사용하는 삶이 되기를. 편하고 즐거운 길 대신, 주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라갈 수 있기를. 오늘 저녁 기도회에서 온 몸을 다 내어 드리는 기도를 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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