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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4:10-20 본문
본문에서 예수는 비유로 가르치시는 이유(10-12절)를 설명하시고, 씨 뿌리는 자 비유를 해설하신다(13-20절). 이 둘은 분리해서 보아도 좋지만 나는 내적인 연결 고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문을 차근차근 묵상하면서 그 고리를 찾아내길 원한다.
본문 전반부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11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제한되어 있음을 이야기한다. 당시 그 비밀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열두 제자"와 더불어 "함께한 사람들"이었다(10절).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열두 제자만 폐쇄적으로 예수와 가까이 지냈던 것이 아니다! 이들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러 여제자들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마 27:57)이나 다른 무명의 제자들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비밀을 모두에게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유명한 이사야서 본문을 인용하여 이 질문에 친히 답하시는데, 이 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사야서 본문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해당 본문(사 6:8-13)은 이사야가 소명을 받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정해진 때가 차기까지 이들이 깨닫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하지만 여기에 중요한 말씀이 하나 나온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13)
예언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세'의 그림을 보면, 죄악이 점점 차올라서 임계치에 도달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끌어낸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징계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를 보존하셔서 경건한 백성이 이어지게 하신다. 이러한 그림을 염두에 두면, 사 6:9-10에서 이야기하는 "이 백성"은 심판의 대상인 이스라엘이고, 사 6:13에서 이야기하는 "그루터기"는 남은 자들에 해당할 것이다.
이 관점에서 예수의 답을 다시금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너희(=제자들)"와 "외인"을 구분하셔서(11절)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제한적으로 알려주신다. 이사야의 예언을 참조하자면 여기서 "외인"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하나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이고, "너희"는 하나님께서 보존시키신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는 "남은 자들"이 이를 듣고 돌아설 수 있게 하기 위하심이었다.
이 가르침(10-12절)이 비유(2-9절)와 그 풀이(13-20절) 사이에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마가복음은 수미상관(inclusio) 기법을 많이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늘 본문이 속한 4장 역시 그런 기법이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역시 이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이 비유에는 총 네 종류의 '밭'이 등장한다. "길가"(15절), "돌밭"(16-17절), "가시떨기"(18-19절), "좋은 땅"(20절)이 그들이다. 이들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람이 나타낸다고 보기는 좀 어렵고, 몇 가지 예를 대표적으로 뽑은 것으로 보인다. 이 밭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누자면, 결실하지 못하는 밭(길가, 돌밭, 가시떨기)과 결실하는 밭(좋은 땅)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결국은 "말씀을 듣고"(14절) 반응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심이다. 이는 다른 말로 고치자면 "하나님 나라의 비밀"(11절)을 각자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앞서 이야기한 "외인"은 길가, 돌밭, 가시떨기와 같이 말씀을 듣고도 깨달음을 얻지 못해 결실하지 못하는 자들이고, "너희"는 말씀을 받아 마침내 결실하는 자들인 것이다.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나는 외인인가, 제자인가? 나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인가, 깨닫지 못하는 자인가? 매일 내게 말씀하시는 주의 세미한 음성에 반응하여 결실하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