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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9:18-2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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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9:18-26

로보스 2016. 6. 10. 02:45

관리 하나가 예수께 나아와 죽은 딸을 살려달라고 청한다(18절). 예수께서 그를 따라가시는 길(19절)에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치유의 소망을 가지고 예수의 옷자락을 만진다(20-21절). 예수께서는 그를 보고 구원을 선포하셨다(22절). 예수께서는 관리의 집에 도착해 장례를 준비하는 자들을 내보내신 후(23-25절) 소녀를 살려내셨다(25절). 이 소문이 널리 퍼졌다(26절).


오늘 본문은 유명한 본문으로, 마가복음(막 5:21-43)과 누가복음(눅 8:40-56)에도 동일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묘사는 조금씩 다른데, 예를 들어 마태복음의 "관리"는 마가복음-누가복음의 "회당장 야이로"와는 달리 딸이 이미 죽었음을 알고 예수께 나아온다. 그럼에도 세 복음서 모두 동일한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녀 이야기와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는 항상 묶여서 다니는 것이다. 이는 두 이야기를 이러한 형식으로 전달하는 것 자체에 어떠한 의미가 있음을 시사한다.


마태복음의 맥락에서 이 두 이야기가 함께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나는 "믿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같은 장 안의 다른 단락들을 살펴보면 중풍병자 친구들의 믿음을 칭찬하신 이야기(마 9:2), 두 맹인의 믿음을 보신 이야기(마 9:29)가 나오고, 무엇보다 본문 자체에서 예수께서는 혈루증 여인의 "믿음"을 언급하신다(22절). 한편 관리의 집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비웃"는 자들(24절)로서, 믿음이 없는 자들을 대표한다.


이렇게 살펴보면 마태가 마가-누가와는 달리 관리가 딸의 죽음을 알고도 예수께 찾아왔다는 식으로 기술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믿음"이 있는 자와 의심하는 자로 확연히 구분된다. 마가-누가의 서술 속에서 야이로는 조금 더 중립적인 인물인 반면, 마태의 서술 속에서 관리는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는 분임을 확실하게 믿는 사람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관리의 믿음은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18절)요, 혈루증 여인의 믿음은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21절)였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사람들은 예수(와 관리)를 비웃었다(24절). 12년 동안 만성적으로 앓아온 질병(20절)이 한 순간에 낫는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관리와 여인은 그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을 믿었고, 예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그들을 구원하셨다.


나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을 믿는가. 내 힘으로, 내 지혜로, 내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을 믿는가. 고통 중에 있는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 구원해주실 분을 믿는가. 그 믿음이 없어서 그 분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내가 겪는 시험이 어렵고 힘겨워도

내 주님보다 크지 않네

내 앞의 바다가 갈라지지 않으면

주가 나로 바다 위 걷게 하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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