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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9:9-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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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9:9-17

로보스 2016. 6. 8. 23:42

예수께서는 마태를 부르셨고(9절),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10절). 바리새인들이 그 광경을 보고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자(11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임을 천명하셨다(12-13절). 이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금식을 두고 물었다(14절). 예수께서는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님을 말씀하시고(15절) 새로운 때가 왔음을 밝히셨다(16-17절).


오늘 본문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마태를 부르시고 그 친구들과 식사하실 때 예수께서 겪으신 논쟁(9-13절)과 요한의 제자들과 금식을 두고 벌이신 논쟁(14-17절)이다. 두 이야기는 예수의 가르침이 얼마나 새로운 것이었는가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앞뒤에 연속적으로 배치된 기적 기사는 그 새로운 가르침이 "옳은" 것임을 증명한다.)


예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즉 세리를 직업으로 하는 마태를 부르셨다(9절). 마태의 반응 역시 선배 제자들(마 4:18-22)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즉시 예수를 따랐다. 예수께서는 마태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고, 그 자리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했다(10절). 이는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바리새인들이 문제로 삼았다(11절). 예수의 대답은 의사는 병든 자에게 필요한 존재요(12절), 예수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이었다(13절). 이 얼마나 새로운 가르침인가?


여기서 예수는 호세아 6:6을 인용한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구약 본문의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다(호 6:4)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그들을 심판하셨다(호 6:5)는 내용이 나온다. 호세아 시절 자기 이익을 위해 살인을 기꺼이 자행하던 지배 계급처럼,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규율에 얽매여 다른 이에 대한 인애를 잊었던 것이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왔다(14절). 이 접속 어구는 두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을 두고 예수께 묻는다(14절). 예수께서는 "신랑"이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고 하시며, "신랑"을 빼앗기면 금식하라고 말씀하신다(15절). 여기서 신랑은 예수 당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셨음을 애통해 하는) 종교적인 금식을 행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그들과 친히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분이 떠나실 날이 올 것이고, 그 때에는 금식을 행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미 산상수훈 안에서 금식에 관한 계명을 주셨다.)


16-17절은 이 두 가지 논쟁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생베 조각과 낡은 옷의 비유(16절), 그리고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의 비유(17절)는 둘 다 새로운 것을 오래된 틀에 끼워맞추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의 가르침, 즉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분은 불완전한 자들을 부르러 오셨다는 그 가르침은 새로운 것이기에, 기존 종교의 틀인 사회적 차별과 금식은 그 가르침을 담아낼 수 없다. 그 틀은 깨져야 하고, 새로운 틀이 만들어져야 한다.


내 안의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는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그 인정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일을 유능하게 잘 해내야 한다는 세상의 가르침이 나를 옥죄고 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의 인애는 성취나 능력과 상관 없이 모든 이에게 내리쬔다는 것이다. 아니, 도리어 하나님의 인애는 부족한 자, 불완전한 자에게 편향되어 있다는 가르침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두 교훈은 서로 상충되기에, 예수의 말씀처럼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 나는 낡은 것을 택할 것인가, 새로운 것을 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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