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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3:22-3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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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3:22-30

로보스 2013. 3. 15. 10:58

본문은 요압이 없는 사이에 다윗이 아브넬의 투항을 받아들여 그를 평안히 보낸 것(22절)을 알고 요압이 분노하여(23-25절) 아브넬을 쫓아가(26절) 결국 그를 속여 죽인 이야기(27절)를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요압이 동생 아사헬의 원수를 갚은 것이라고 설명한다(27, 30절; cf. 삼하 2:18-23).

흥미로운 것은 이에 대한 다윗의 반응이다. 우선 다윗은 아브넬의 항변(23-25절)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아브넬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 알지 못했다(26절). 알게 된 이후, 다윗은 아브넬의 피에 대해 무죄하다고 선언하며(28절) 요압을 저주한다(29절). 이는 "악행"이었기 때문이다(삼하 3:39). 이 사건은 다윗에게 깊이 각인되어, 그가 죽기 직전 솔로몬에게 내린 유언에서도 등장한다. 요압은 평화의 때에 "전쟁의 피"(왕상 2:5-6)를 흘린 자로, 평안히 세상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결국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을 받아 요압을 죽인다(왕상 2:34). 이 때 솔로몬이 한 말 또한 흥미롭다. 요압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자"를 죽여 "까닭 없이" 피를 흘린 자이기에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다(왕상 2:31-33). 이스라엘 백성 또한 다윗의 입장에 선다. 다윗이 아브넬의 피에 무죄하다는 것을 안 이스라엘은 함께 기뻐했다(삼하 3:36-37).

하지만 이 내용은 일견 이상하다. 율법에서 친족이 살해되었을 때 그 원수를 갚으라고 명하는 것(민 35:16-25)을 볼 때 요압의 행동은 의로운 것 아니었는가? 율법 본문을 보면 부지중에 살인을 저질렀을 때만 도피성으로 피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했는데, 아브넬은 전쟁 상황에서 아사헬을 죽일 마음을 먹고 죽였으니 그 면책 조항에 속하지도 않는다. (cf. 출 21:14; 이 점에서 날샘은 도피성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요압을 악인으로 묘사하고 있는 걸까?

다시 한 번 아브넬의 행동이 율법에 비추어 볼 때 죄였는지 알아보자.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사건이 묘사된 삼하 2:18-23을 보면, 아브넬은 아사헬을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아사헬이 계속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오니 할 수 없이 그를 죽인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즉, 요즘 용어로 말하자면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살인이었던 것이다. 그럼 율법이 정당방위를 옹호하는가? 글쎄, 이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나, 율법에서 밤에 뚫고 들어온 도적을 죽이는 것은 무죄로 보는 점(출 22:2)으로 미루어 볼 때 율법은 정당방위 개념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브넬이 아사헬을 "부지중에" 죽인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죽인 것은 아니었다. 이는 정당방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당방위를 했던, 즉 율법에 비추어 볼 때 죄가 없던 아브넬을 자신의 복수심을 잠재우기 위해 살해했던 요압은 악인인 것이다. 하나님이 죄 없다 하신 자를 내 만족을 위해 살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반역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런 악한 자를 심판하시는 분(삼하 3:39)이시다.

예수께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고 하셨다(마 5:21-22). 나는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자를 내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인"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마저 용서해 달라 기도하셨던 주님을 본받아, 나도 내 속에 불타오르는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노를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로 녹이는 사람이 되길 기도한다.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어찌 사소한 빚에 분노할 수 있겠는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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