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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5:12-17 본문

큐티

롬 5:12-17

로보스 2014. 4. 24. 23:30

지난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논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아담, 모세와 비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적 의미를 설명한다. 이 부분은 조직신학의 죄론과 구원론을 따지는 데 중요한 부분이므로 조금 자세히 살펴볼까 한다.


우선 아담은 어떤 존재인가? 죄를 세상에 들여온 존재이다(12절). 그가 죄를 지었기에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고(12절), 이 사망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지배하였다(14절). 이를 죄의 유전 개념으로 쉽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바울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바울이 본문에서 죄의 유전 개념을 옹호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12절). 차라리 14절은 율법과의 관계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모세는 율법의 전달자로서 본문에 등장한다(14절).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죄를 죄로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13절). 따라서 율법이 등장한 이후에는 더이상 핑계를 댈 수 없다.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그렇다면 율법이 등장하기 전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바울은 그들도 전부 사망의 지배를 받았다고 말한다. 바울이 이에 대해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롬 2장을 참고하면 율법 없던 시절의 사람들 역시 양심을 통하여 무엇이 죄인지는 알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롬 2:14-15).


바울은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14절)라고 선포하고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을 15-17절에 걸쳐 제시한다. 우선 둘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아담의 범죄를 통해 사망이 이 땅에 들어왔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은사가 이 땅에 들어왔다(15, 17절). (바울은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라고 명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결과는 현저히 다르다. 사망과 은사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15절). 또한 심판은 각 개인의 죄를 하나씩 정죄하는 것이지만, 은사는 한 번에 많은 죄를 의롭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16절). (내 기억에 본회퍼는 은사가 "죄인"을 사하는 것이지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본문과 상충되는 것은 아닌가?)


다시 본문을 종합적으로 살피자면, 아담은 죄인의 모형이다. 그가 죄를 범하였기에 처음으로 사망이 이 땅에서 활개를 칠 수 있었다. 그와 똑같은 모양으로 인류는 계속해서 죄를 범하였고, 사망은 그 통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율법이 들어온 이후로는 율법에 의해 죄가 더욱 확실히 알려졌으나, 그로 인해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사망의 통치는 여전히 유효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기도 하다. 최초로 죄를 범한 한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최초로 칭의의 은사를 베푸셨다.


또 한 번 복음이다. 꼼짝없이 사망의 지배 아래 있던 나를, 예수께서는 "은사"로서 의롭다 칭하셨다. "은사"라 함은 아무런 대가 없이 받은 선물을 말한다. 내가 무엇이 사랑스럽다고 나를 사랑하시고 은사를 베푸신 것일까. 자격 없는 죄인이니 응당 그 은혜에 감격하며 살아야 할 터인데, 너무도 쉽게 은혜를 잊는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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