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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0:32-34 본문
오늘 본문은 또다른 수난 예고를 담고 있다. 특히 32절 전반부는 이후에 일어날 일을 요약하는 문장으로, 다른 구절들의 도움을 받아 특별히 이 문장을 찬찬히 묵상해보길 원한다.
먼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라는 표현을 살펴보자. 다윗 성이라 불리었던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왕의 즉위식을 상징한다. 마가는 "올라가다(ἀναβαίνω)"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 길이 영광스러운 길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예수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실상 고난과 죽음을 의미했다(33-34절). 그의 즉위식은 왕좌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이 얼마나 큰 아이러니인가?
그런데 그 길에서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셨다. 예수께서는 고난과 죽음의 길임을 아심에도 앞장 서서 그 길을 걸어가신 것이다! 베드로는 이와 같이 말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예수께서는 그 힘든 길로 제자들을 떠미시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말 없이 그 길을 먼저 걸으셨고, 이로써 제자들의 본이 되셨다.
그의 행보를 본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본문의 '놀라다(ἐθαμβοῦντο)'라는 단어와 '두려워하다(ἐφοβοῦντο)'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내 생각에 이 동사들은 서로 다른 반응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점층을 나타내기 위한 문학적 장치이다. 핵심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예수께서 영광스럽게 왕위에 올라 로마 제국과 그들의 앞잡이들을 싸그리 몰아내주실 것이라 기대했는지 모른다(cf. 막 10:35-45). 하지만 예수께서 걸으신 그 길은 그런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수께서 "당할 일"(32절)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다시 이어 이방인들에게 "넘겨지는" 것이었다(33절).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은 그를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33-34절). 이것이 제자들을 놀라게, 그리고 두렵게 했던 것이 아닐까.
주님이 가시는 그 길은 놀라고 두려워할 만한 일이 가득한 길이었다.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다른 이들에게 넘겨져 조리돌림을 당하고 조롱과 수모를 당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온갖 치욕과 고통 끝에 죽음을 당하는 길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길을 앞장서 걸으셨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는가. 예수께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셨던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소망을 품고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는가.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주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