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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0:27-40

로보스 2018. 12. 12. 14:10

성전에 계신 예수께 다음으로 시비를 건 것은 사두개인들이었다(27절).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었기에(27절) 정교한 패러독스를 만들어 냈다. 율법에 따르면 형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취하게 되어 있다(28절; 신 25:5). 그렇다면, 7형제가 있어 첫째가 결혼한 후 자식 없이 죽어 둘째가 그 아내를 취하고(29절), 마찬가지로 그도 아들 없이 죽어 셋째가 아내를 취하고, 이런 식으로 모두가 한 번씩 그 여자와 결혼하고 자식을 두지 못했다면(31-32절), 부활 때 누가 그의 남편이 되겠는가(33절)?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모두가 그 여자의 남편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부일처의 원칙이 깨지는 것이고, 그 중 하나를 고르자니 그들 모두가 한 번씩 남편이었던 몸이다. 아마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을 논박할 때 이 질문을 즐겨 사용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에 대해 놀라운 답을 주신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결혼을 하지만(34절)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들은 결혼하지 않으며(35절) "천사와 동등"하다는 것(36절)이다.


이 예수의 대답을 곰곰히 뜯어보자. 이 대답은 마태복음 및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마 22:29-30, 막 12:24-25)에 비해 다소 장황하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부활한 몸은 더 이상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고만 말씀하신다. 누가복음은 그 텍스트에 대한 주해인 것처럼 보인다. 본문은 "이 세상의 자녀들"(34절)과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35절)을 대조하고 있다. 특별히 후자는 "부활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로도 칭해진다(36절).


언뜻 보면 전자는 세상 사람들, 후자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후자가 "천사와 동등"하다는 표현(36절)으로부터,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부활한 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즉, 부활하지 않고 아직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결혼하지만, 부활한 사람들은 결혼할 일도 없고 다시 죽을 일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천사와 동등하고, 부활의 자녀이자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 출 3:6을 인용하신다(37절). 사두개인들이 모세오경만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들이 인정하는 성경에서 근거를 찾아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모세에게 당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는데, 하나님이 산 자의 하나님이라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역시 산 자 아니겠는가? 예수께서는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라고 쐐기를 박으신다(38절). 그러자 서기관들 일부가 그 말에 동의할 뿐(39절) 그 누구도 더 묻지 못했다(40절).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읽어낼 수 있다. 예수의 지혜로우심과 부활 교리의 확실함이다.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의 정교한 함정 질문(28-33절)에 빠지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이 인정하는 성경(37절)으로부터 차근차근 논증해 가신다(34-38절). 그 대답을 듣고 그 누구도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40절). 예수의 지혜로우심을 닮고 싶다.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을 향해 무조건 윽박지르는 것도 아니요, 반대로 그 사람의 모든 주장을 인정하는 것도 아닌, 지혜롭게 우리의 진리를 설명하는 태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부활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걸림이 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강력하게 말하듯(고전 15장),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이 다 헛된 것이다(고전 15:14). 예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부활이 확실하게 존재함을 말씀하신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육신으로는 죽었지만 하나님께는 산 것처럼, 우리 또한 육신으로 죽더라도 다시 살 것을 믿는다. 우리의 믿음은 부활에 있다. 다시 한 번 그 신앙을 다잡는 시간이 되길 원한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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