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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5:11-32

로보스 2018. 11. 7. 12:58

예수께서 베푸신 세 번째 비유는 유명한 '탕자의 비유'이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11절). 둘째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청했고, 아버지는 그 말대로 들어주었다(12절). 그는 그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허랑방탕하게 살다가(13절) 재산을 다 날려 버렸다(14절). 그는 그 나라에서 일할 곳을 구했는데, 다름이 아니라 돼지를 치는 일이었다(15절). 그는 배가 고픈 나머지 돼지 먹이라도 먹으려 했지만 주는 사람이 없었다(16절).


비참한 상황 가운데,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이 풍족했던 것을 깨닫는다(17절). 그는 집으로 돌아가 죄를 자복하고 품꾼으로라도 써달라고 청하겠다고 결심한다(18-19절). 그가 집으로 돌아오자 그 아버지가 그를 멀리서부터 그를 발견하고 뛰어가 그를 맞이한다(20절). 아들은 생각했던대로 아버지에게 말하지만(21절) 아버지는 들은 체 만 체 하고 아들을 잘 입히고(22절) 잔치를 연다(23-24절).


한편 밭에서 일하던 맏아들은 집에 오는 길에 풍악 소리를 듣고(25절) 종에게 무슨 일인지 묻는다(26절). 자초지종(27절)을 들은 그는 분노하여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28절). 아버지가 나와 들어오라고 권하자(28절) 아버지의 명대로 순종한 자신에게는 아무런 상급이 없었는데(29절)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해 버린 동생에게는 잔치를 열어준 것을 따진다(30절). 아버지는 그에게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므로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답한다(31-32절).


나는 맏아들과 아버지의 대화에 주목해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 싶다. 본문의 비유는 명백하게 두 부류의 사람을 가리킨다. 맏아들이 상징하는 '순종적'인 사람들과 둘째 아들이 상징하는 '허랑방탕'한 사람들이다. 첫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겨 명을 어김이 없"이 살았던 반면(29절), 후자는 하나님을 떠나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13절). 하지만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돌아왔다"(20절). 이를 두고 본문의 아버지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4, 32절)라고 부른다.


예수께서 소위 율법의 관점에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신 것(눅 15:1)은 바로 이와 같은 연유에서였다.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보다 하나님 나라 밖에서 "궁핍"하게(14절)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의 관심사였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로 돌아와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손에 가락지를" 끼고 "발에 신을" 신는 것(22절)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영혼이 돌아올 때 그 나라에서는 큰 잔치가 열린다(23, 25, 32절; 눅 15:7).


그렇다면 맏아들은 억울하지 않겠는가? 오늘 아버지의 대답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31절)이라고 말한다. 즉,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의 자원을 누리고 있는 것이기에 회개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기쁨을 부러워 하거나 시기할 필요가 없다. 도리어 한 영혼이 돌이켰을 때 응당 아버지의 기쁨에 함께 동참하고 즐거워해야 할 것이다(32절).


나는 율법의 관점에서 이방인 출신이지만, 한편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모태 신앙인이다. 따라서 실상은 내가 둘째 아들과 같은 사람이지만, 스스로를 맏아들처럼 여길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어째서 하나님은 저렇게 엉망진창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을 내버려 두시는 걸까?' 나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았다. 하나님은 오늘 내게 말씀하신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돌아온 동생을 기쁨으로 환영해주지 않으련?" 순수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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