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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33:1-9 본문
므낫세는 왕위에 올라(1절)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다(2절). 그는 산당을 세우고 우상을 만들었으며(3절) 이방 종교의 악한 풍습을 따라 했으며(6절), 특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말씀하신 성전(4, 7-8절)에 이방 신들을 위한 제단을 쌓고(4-5절) 우상까지 세웠다(7절). 이로 인해 백성들까지 현혹되어 하나님 앞에서 큰 악을 범하게 되었다(9절).
오늘 본문은 왕하 21:1-9를 거의 그대로 옮겨 놓았다. 저자의 의도가 특별히 드러나는 수정도 보이지 않기에, 오늘은 내용 자체에 집중하여 묵상을 하고자 한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므낫세의 재위 기간이다. 그는 12세에 위에 올라 55년간 통치했다(1절). 이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통치한 기간의 거의 두 배에 해당한다(대하 29:1에 따르면 히스기야는 29년간 다스렸다). 그럼에도 므낫세에 관한 기록(20절)보다 히스기야에 관한 기록(117절)이 훨씬 길다.
그 긴 재위 기간을 요약하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이었다(2절). 본문은 그의 악행을 자세히 기술하는데, 우상숭배 외의 악행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산당을 다시 세우고, 바알 제단과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며, 하늘의 천체들을 숭배했다(3절). 성전에 제단들을 쌓고(4절), 성전 마당에 일월성신을 숭배하는 제단을 쌓았으며(5절), 이방 종교의 풍습을 따라했다(6절). 그리고 성전에 목상을 세웠다(7절). 게다가 그가 앞장 서서 이런 일을 행하자 백성들까지 미혹되었다(9절).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본문은 두 번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데, 두 번 다 성전을 가리킬 때 등장한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예루살렘에 영원히 두시겠다는 말씀이 나오고(4절), 유사한 말씀이 반복된 후(7절)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 가나안에서 영주할 수 있다는 말씀이 등장한다(8절). 여기서 성전과 율법이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으로 다시금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본문이 우상숭배의 기준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2절), 혹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모든 나라"(9절)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거의 유사한 표현이 수미쌍관으로 등장하는 것을 볼 때, 기자는 ("유다"가 아닌) "이스라엘"의 역사를 상기시키려는 것 같다. 모세와 여호수아 앞에서 가나안의 이방 민족들이 멸망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 외의 헛된 우상들을 섬겼기 때문 아닌가? 지금 므낫세와 유다는 그 길을 또 걸어가려고 한다.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하나님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시고(2절) 멸하셨다(9절). 그리고 정복한 땅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지명하여 당신의 이름을 두겠다고 하셨다(4, 7절).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른다면 그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라 약속하셨다(8절). 하지만 므낫세는 이 모든 것을 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정확히 반대로 행하고 있었고, 그 악에 백성들마저 현혹되어 버렸다(9절). 그의 통치는 아버지의 통치보다 길었지만(1절)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점철되어 있었기에(2절) 치욕스러운 역사로 남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돌아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다시 생각해 본다. 요 며칠 깨달은 사실이 있다. 내가 하나님과 연결되면 주위 사람들에게도 선하게 행동하지만,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인간적인 본성으로 그들을 대한다는 것이다. 어느새 나는 주위 사람들에 대해 불평하고 판단하며 스스로 보좌에 앉아 있었다. 하나님 앞에 나가 무릎을 꿇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고개를 숙이자,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다시 깨닫게 하셨다. 삶의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기억하기를 원한다.
아침의 이슬 방울 쉬 사라짐 같이
내 기억 부족하여 늘 잊기 쉬우니
잘 알아듣기 쉽게 늘 말해주시오
날 구속하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