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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신 예수께서, 이를 두고 신성모독이라 생각하는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다루고 있다. 흔히 9절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는 질문은 두 가지 말 모두 어렵다는 답을 유발하는 난문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앞뒤 문맥을 살펴보자면 이 구절은 분명 죄 사함을 선포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e.g. 10절 "그러나(δὲ)"). 그렇다면 왜 죄 사함을 선포하는 말이 더 어려울까? 서기관들의 생각대로,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능히 죄를 사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7절). 만약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신성모독"인 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본문은 중풍병자를 예수께 메고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이들은 예수께서 그를 고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로 나아 왔으나(3절)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모인 사람들(2절) 때문에 예수께 접근할 수 없었다(4a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포기할 이 순간, 그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어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께 달아 내렸다(4b절). 예수께서 보신 "믿음"은 이것이다(5a절). 이들은 예수만이 우리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것을 강하게 믿고 있었다. 어떻게 일하실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병자를 예수께로 데리고 가면 예수께서 고쳐주실 것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병자를 예수 앞에 데려다 놓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믿음을 보신 예수께선 무엇을 하셨는가..
참 복음서는 한 구절 한 구절 묵상할 포인트가 많다. 그 중 한 가지만 추려서 묵상하기란 참 쉬운 일이 아니구나.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나병환자 한 사람을 고치시는 내용이 나온다. 날샘은 "전파"에 초점을 맞춰서 본문을 묵상했지만 나는 치유 장면 그 자체에 더 주목하길 원한다.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바라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41절)이 내 마음을 쿵 울렸다. 나병환자와 예수의 말 역시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40절)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41절) 예수께서는 어그러지고 무너진 세상과 그 세상 속에서 고통 받는 인간들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그 세상과 인간이 깨끗해지는 것을 "원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말씀이 육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전도"였다(38절).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찾을 때(37절) 그는 다른 마을로 가서 다른 이들에게 전도하기를 원하였다. 여기서 "전도"는 무엇인가?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해당 단어는 "선포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는 이곳 저곳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라는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 본문은 이 메시지와 함께 귀신들이 떠나갔다고 증언하는데(39절), 이는 이 메시지가 그저 말잔치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맛보여주면서 선포되었음을 나타낸다. 이 메시지는 예수 자신의 것이었는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그를 보내신 분, 즉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전파하셨다(요 7:16). 이를 ..
오늘 본문은 예수의 축귀 및 치유 사역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먼저 시몬의 장모를 고치신 사건(29-31절)이 소개되고 이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일이 등장한다(32-34절). 이는 지난 본문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두 사건 모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예수의 "권위"이다(cf. 막 1:27). 예수께서 열병을 고치신 방법은 복잡하지 않았다.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을 뿐이다(31절). 또한 그는 귀신과 싸우지 않으셨다. 그저 내쫓으셨다(34절). 귀신이 말하려고 할 때 그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실 수 있는 권위 역시 가지고 계셨다(34절).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이 땅의 정사와 권세가 아무리 강해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아들 그 분 앞에서는 순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