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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매오는 무엇을 원하여 "소리 질러 이르"고(47절)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고(48절)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갔는가(50절)? 그의 요청은 간명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51절) 나에게는 이와 같은 간절함이 있는가? 주여, 내가 주를 보기를 원하나이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그 영광 중에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청을 드렸다는 사실(막 10:37)이 알려지자 다른 제자들이 분노했다(41절). 아마 질투에서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불러다가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께서는 이 가르침 속에서 "이방인의 집권자들"(42절)과 "너희"(43절)를 대조하신다. 이방인의 집권자들, 즉 세상의 권세는 자신의 신민을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린다(42절). 하지만 "너희", 즉 예수의 제자들은 "섬기는 자"여야 하고(43절) "종"이 되어야 한다(44절). 어째서 그런가? 그들의 스승이자 주(요 13:14)인 "인자"께서 죽기까지 섬기셨기 때문이다(45절).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제자들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처럼 되기를 원했고 장차 그렇게 될 것을..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은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이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38절)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결국 예수께서 마시는 잔을 마시며 예수께서 받는 세례를 받게 될 것(39절)이라는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뒤를 따랐다. 예수의 뒤를 따르는 자라면, 그가 마시는 고난의 잔과 그가 받는 치욕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일 다 할 수 있나주가 물어보실 때용감한 자 바울처럼선뜻 대답하리라
오늘 본문은 또다른 수난 예고를 담고 있다. 특히 32절 전반부는 이후에 일어날 일을 요약하는 문장으로, 다른 구절들의 도움을 받아 특별히 이 문장을 찬찬히 묵상해보길 원한다. 먼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라는 표현을 살펴보자. 다윗 성이라 불리었던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왕의 즉위식을 상징한다. 마가는 "올라가다(ἀναβαίνω)"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 길이 영광스러운 길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예수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실상 고난과 죽음을 의미했다(33-34절). 그의 즉위식은 왕좌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이 얼마나 큰 아이러니인가? 그런데 그 길에서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셨다. 예수께서는 고난과 죽음의 길임을 아심에도 앞장 서서 그 길을 걸어가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