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분류 전체보기 (1206)
Lovos credit
에서는 성경의 창조 기사를 일종의 문학적 장치로 본다. 특히 여섯 날의 배치가 다음과 같이 [배경 창조 - 등장 인물 창조]의 도식에 잘 맞는다는 것이 그 강력한 근거이다. 첫째날 - 빛과 어두움 / 넷째날 - 일월성신 둘째날 - 궁창과 물 / 다섯째날 - 바다와 하늘에 사는 생물들 셋째날 - 뭍과 식물 / 여섯째날 - 육지에 사는 생물들 헌데 여기서 현대인의 생각으로는 잘 안 맞는 내용이 있다. 우리는 '식물'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지금 우리는 식물이 당연히 생물이라고 생각하고 살지만, 히브리인들도 식물을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는 문제다. 이를 알기 위해선 성경에 나타난 '식물'의 위치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이 글에..
평신도를 위한 성경신학책. 많은 사람들이 좋은 책이라고 추천했고, 나 역시 성경을 좀 "제대로" 읽어보고 싶어서 이 책을 샀다. 다 읽고 나니 확실히 만족스럽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성경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점이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올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이 책에서 가르치는 방법을 잘 활용할 수만 있다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책은 짤막하게 성경 해석학의 원리를 설명한 후 재빨리 성경 본문으로 들어가 실제로 원리들을 적용해 보인다. 본문도 다양한 종류의 본문을 다루는데, 그 순서만 봐도 저자들의 신중한 배려가 느껴졌다. 단순히 성경에 수록된 순서대로 진행하는 대신, 난이도 순으로 비교적 해석하기 쉬운 서신서에서부터 상당히 난해한 요한계시록까지 배치를 해놓았기 때..
무명의 그리스도인 시리즈의 두번째 책. 제자반 때문에 을 샀더니 어머니께서 그 책 좋더라고 혹시 같은 저자의 다른 책 없느냐고 물어보셔서 이 책을 샀다. 아주 먼 옛날에 -_-;; 어머니께선 이미 여러 번 읽으신 모양이던데, 정작 책을 산 나는 이제서야 읽어보았다는... 이 책의 메시지는 아주 간명하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의지하라!" 책에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하려고 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우리의 의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 않은가? 그저 우리가 할 일은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그의 '온전한 의'가 내 안을 채우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기쁨과 평안이 자연스레 임할 것이고, 삶 가운데 항상 승리가 찾아올 것..
다 표현 못 해도 나 표현하리라 다 고백 못 해도 나 고백하리라 다 알 수 없어도 나 알아가리라 다 닮지 못 해도 나 닮아가리라 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날 부요케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어쩌다보니 포스팅이 좀 늦었는데, 지난 주 엘티 시간에 불렀던 곡이다. 아마 전에 한 두 번 들어봤겠지만, 직접 불러본 건 처음이었다. 더듬더듬 따라부르는데 가슴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보여준 그 사랑을, 비록 나의 부족한 표현력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지라도,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노래한다. 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어찌하여야 그 크신 은혜 갚으리 무슨 말로써 그 사랑 참 감사하리요 하늘의 천군 천사라도 나의 마음 모르리라 나 이제 새 소망이 있음은 주님의 은혜라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날 사랑하신 주 그 피로 날 구했네 죄에서 건지셨네 하나님께 영광 날 사랑하신 주 바치리라 모두 나의 일생을 당신께 세상 영광 명예도 갈보리로 돌려보내리 그 피로 날 구했네 죄에서 건지셨네 하나님께 영광 날 사랑하신 주 이번 주 대예배에서 헌금송으로 나온 곡. 부르시는 분이 정말 마음을 다해 부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세 번 반복하는 부분에서는, 참 별거 아닌 가사인데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이 쓰신 에 보면, '찬양'은 어떤 업적에 대해 돌리는 것이..
전에 알라딘에서 이것저것 아이쇼핑을 하다가 벌코프 본좌님을 검색해보았는데 이 책이 최근 책으로 올라와 있었다. 2008년 출간. 물론 벌코프 횽은 옛날에 돌아가셨으므로 새로 쓰신 건 아닐테고, 그냥 이번에 새로 번역해서 내놓은 책인 모양이다. 제목에 확 끌렸다. 일전에 '해석학'에 대해 주워들은 적도 있고, 최근 성경신학에 관심도 생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질렀다. 가격도 싸고 -_-; 받아서 읽어보니 역시나 "교과서"였고, 왜 벌코프 책들이 신학 교과서의 본좌인지 알게 해주었다. "역시 벌코프 형님"이라는 느낌. 책 전체가 체계적이고 분석적이며,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곳곳에 묻어난다. 물론 그러다보니 읽기 힘들어지는 면도 있지만...; 벌코프는 우선 성경 해석의 역사를 소개한다. ..
8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8-10) "사랑장"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의 우월함을 설명하면서 예언, 방언, 지식과 비교한다. 물론 바울이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사랑이 우월하다는 것인데, 이 구절을 근거로 어떤 신학자들은 예언과 방언과 지식이 사도 시대 이후로 중단되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특히 이들은 "온전한 것"을 신약성경이 완성된 것으로 보아 신약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예언, 방언, 지식이 멈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본문이 이들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을까?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다음 구절들..
'죄'란 무엇인가? 추상적으로 설명하기는 쉽다.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자기 주장 의지 등으로 설명하면 되니까. 그런데 특정 행동이 죄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특히 요즘 같이 교회가 다양화된 시대에는 어떠한 행동이 죄인지 명확하게 단정하기 힘들어 보인다. 일례를 들어, 일요일에 음식을 사먹는 것은 죄인가? 보수적인 교회에선 이를 죄라 규정하고 꺼리는 반면, 그렇지 않은 교회들도 있다. 술을 먹는 것은 죄인가? 혼전순결을 깨는 것은 죄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우리는 무어라 답해야 할까?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은 이와 비슷한 문제를 다룬다. 당시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한 부류는 열광주의자(enthusiast)로,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것이..
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3-4) 이 구절에서 두 가지를 발견했기에 메모해둔다. 1) 우선 이 구절은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일전에 예수가 메시아임에 대한 증거라는 글에서 예수가 메시아인 것이 어떻게 확증되었는지를 논한 바 있는데, 본문이 그에 대한 대답으로 어느 정도 인정받을 수 있겠다. 바울이 부활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사건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면 김세윤 교수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는 거니까. 2) 또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웨인 그루뎀의 26장에서 그리스도의 위격을 논하는데, 특히 인성과 신성이..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에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바울이 쓴 편지이다. 특히 7장부터는 구체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나오는데, 그렇게 다루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이 '우상의 제물' 문제이다. 1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 8:1) 고린도(우리가 알기로는 코린트 Corinth)는 그리스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 날마다 온갖 신전에서 제사가 있었고 제사가 끝난 고기는 시장으로 흘러나와 판매되었다고 한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한다. 우상에 바쳐졌을지도 모르는데,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어야 하는가? 혹은 남의 집에 초대 받았을 때, 고기가 나왔으면 먹어야 하는가? 고린도 교인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두 패로 갈려서 엄청나..
김세윤 교수의 3장에서 필자는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인 것을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선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 제자들이 그를 메시아로 믿었다는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의 입장을 인용하고 그 입장을 반박한다. 구약이나 당시 유대 문서에는 메시아의 부활 사상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김 교수는 이에 대한 답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한다. 1) 예수는 삶과 메시지를 통해 자신이 '죽기 위한' 메시아임을 드러냈다. 2)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로써 예수는 자기 성취를 이루었으나 그 죽음이 참된 것인지 알 길은 없다. 3) 예수가 부활했다. 부활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이 예수의 말을 확증한 것이다...
김세윤 교수의 를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가리켜 메시아나 그리스도라 직접적으로 일컫지 않고 "인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아나 그리스도라 하면 정치적 해방자를 떠올리는 경향이 있었기에 그걸 막기 위해서 다른 표현을 우회적으로 사용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다음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5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요 4:25-26)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복음서에는 이런 구절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한 가..
우리 교회에는 예배 중에 통성으로 회개하는 시간이 있다. 어제 그 시간에 기도를 하다가 한 단어가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INCORRIGIBLE 단어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교정(矯正)할 수 없는, 구제[선도]할 수 없는 2 다루기 힘든, 제멋대로 구는 3 고쳐지지 않는, 뿌리깊은 고집불통. 구제불능. 잘못한 것을 깨닫고도 다시 돌아가 죄를 범하는 나의 모습이 정말 이 단어에 정확히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11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잠 26:11)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10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마 17:10-13) 11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네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우리 가슴에 새긴 주의 십자가 사랑 나의 교회를 사랑케 하네 주의 교회를 향한 우리 마음 희생과 포기와 가난과 고난 하물며 죽음조차 우릴 막을 수 없네 우리 교회는 이 땅의 희망 교회를 교회 되게 예밸 예배 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의 부흥의 날 오늘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 성령 안에 예배하리라 자유의 마음으로 사랑으로 사역하리라 교회는 생명이니 교회를 교회 되게 예밸 예배 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한 부흥의 날 오늘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 요즘 대예배 시작 전에 종종 부르는 곡. 들을 때마다, 부를 때마다 감동 받는 곡이다. 거짓 가르침과 우상 숭배가 횡행하는 이 땅의 교회와 예배 가운데 주님께서 역사하사 "교회를 교회 되게, 예배를 예배 되게"..
스가랴 3장의 구도는 상당히 재미있다. 기본적인 배경은 욥기 1, 2장에 나오는 '하늘의 회의'를 연상시킨다. 6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욥 1:6) 1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욥 2:1) 스가랴 3장에서는 이 '하늘의 회의'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참석하여 재판을 받는 것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1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여호수아가..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8) 대학부 9/13 설교에서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더불어 평안함의 상징으로,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멸망한 조국을 보며 (정치적인) 메시야가 도래해 조국에 평화를 가져다 주리라 믿으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였다. (포도나무는 그 아래에서 기도하기에 불편하였기 때문에 주로 무화과나무가 기도처로 선택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본문은 나다나엘이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리는 경건한 유대인이었음을 나타내며, 예수님이 그의 기도를 보셨다는 것..
(통일찬송가 265장)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세계 만민이 의의 길 이 길 따라서 살 길을 온 세계에 전하세 만백성이 나갈 길 어둔 밤 지나서 동튼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주 예수의 나라 이 땅에 곧 오겠네 오겠네 주 예수 따르라 승리의 주 세계 만민이 돌아갈 길과 진리요 참 생명 네 창검을 부수고 다 따르라 화평왕 어둔 밤 지나서 동튼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주 예수의 나라 이 땅에 곧 오겠네 오겠네 놀라운 이 소식 알리어라 세계 만민을 구하려 내 주 예수를 보내신 참 사랑의 하나님 만백성이 따를길 어둔 밤 지나서 동튼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주 예수의 나라 이 땅에 곧 오겠네 오겠네 고난길 헤치고 찾아온 길 많은 백성을 구한 길 모두 나와서 믿어라 온세상이 마침내 이 진리에 살겠네 어둔 밤 ..
그루뎀은 자신의 조직신학 책 19장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 중에는 성자 예수님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천사가 종종 자신을 하나님으로 칭하였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피조물에 불과한 천사가 자신을 하나님으로 칭할 수는 없기에,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그 자리에 끼워 넣은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논증은 성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속성과 천사의 속성을 '먼저' 정의하고 그로부터 이성을 사용하여 이와 같은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철학적 신학 논증이라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중세 신학의 잔재일지도?) 우선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우선 유명한 장면을 살펴보자.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에서가 기..
1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 6:1-2) 본문에 나오는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예언으로 봐도 괜찮을까? 문맥은 이렇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자 분노한 하나님이 그들을 갈기갈기 찢으셨다(호 5장). 그러자 깨달은 자들이 본문과 같은 말을 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물론 『호세아』의 저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을리가 없으므로,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짧은 기간" 안에 복구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