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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5:31-4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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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5:31-46

로보스 2016. 11. 16. 11:09

이제 마지막 때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다. 예수께서는 최후 심판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는 보좌에 앉아(31절) 모든 민족을 앞에 모으고(32절) 구분하여 "양"과 "염소"를 나눌 것이다(33절). 여기서 예수는 숨기지 않고 당신이 심판주로서 심판을 내리실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는 천사들을 대동하고 이 땅에 영광스럽게 임하여 통치하실 것이다(31절).


오른쪽에 있던 "양"들은 "복 받을 자들"로서,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다(34절). 이 나라는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이 세상과 분리된 천상의 나라라기보다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게 될 이 땅 위의 나라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다른 말로 "영생"으로 칭해진다(46절). "양"들이 칭찬을 들은 이유는 예수를 공궤했기 때문인데(35-36절), 정작 그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되묻는다(37-39절). 예수의 대답은 당신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당신께 한 일이라는 것이었다(40절).


반면, 왼쪽에 있던 "염소"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로서, 악한 영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에 떨어질 것이다(41절). 이는 다른 말로 "영벌"로 칭해진다(46절). 그들의 죄는 예수를 공궤하지 않았기 때문인데(42-43절),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이들은 자신들이 언제 예수의 어려움을 보고 돌보지 않았냐고 되묻는다(44절).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예수께 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답하신다(45절).


어떤 이들은 이 본문을 근거로 구원 여부는 구제 사역에 얼마나 힘썼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성경 전체를 볼 때 그것이 일관된 구원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오늘 본문 해석의 핵심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40절). 이를 일반적인 가난한 자로 볼 것인가, 아니면 믿는 자의 공동체 내에 있는 가난한 자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 전체 본문의 해석을 결정한다. 나는 마태복음이 교회 공동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사를 볼 때, 오늘 본문의 "작은 자"는 교회 내의 어려운 사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야고보서가 신앙과 행실을 연결시키는 것을 디딤돌 삼아 오늘 본문을 해석해 보고자 한다. 야고보는 자신의 서신 속에서 믿음은 행함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한다고 말하며(약 2:18), 그 예로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형제자매를 돕는 것을 든다(약 2:14-17). 여기서 예상 독자는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최소한 믿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이고, 그들에게 행함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 역시 이미 믿음을 가진, 교회 공동체의 일원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들이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교회 공동체의 어려운 자들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야고보서의 표현대로 "죽은 믿음"에 불과하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며, 외면하는 자들은 영벌에 들어갈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를 덧붙이고 있다.


우리의 구원은 믿음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은 말에서 그치는 믿음이 아니고 행함으로 증명되는 믿음이다. 나는 내 공동체 내의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주님 섬기듯 섬기고 있는가? 내 배가 부르고 내 등이 따뜻하다 하여 주위를 외면하는 "저주를 받은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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