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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6, "세상의 공격이란" 본문

설교

20100606, "세상의 공격이란"

로보스 2010. 6. 7. 02:10
설교자: 박희원 목사
설교 본문: 다니엘 6:5
5그들이 이르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 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공격받지 않는다면, 우리가 세상과 같은 편이라고 여겨진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우리 잘못으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세상의 공격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공격은 어떤 것인가?

<다니엘> 6장을 보면, 세 명의 총리 중 한 명이었던 다니엘(2절)이 워낙 유능하니 왕이 그에게 모든 국무를 맡기려 한다(3절). 그러자 이를 시기한 주위 신하들이 다니엘을 실각시키려고 한다(4절). 문제는, 다니엘의 행실에는 "아무 그릇됨"도 "아무 허물"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대적들은 "하나님의 율법"으로 함정을 판다(5절). 이렇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당하는 고난이 세상의 공격이다.

하지만 주의하자. 만약 우리가 세상의 원리를 따라 동일하게 경쟁하고 탐욕을 부리다가 곤경에 처하게 된다면, 그것은 세상의 공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회초리일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였던 유다를 바벨론이 침공해서 멸망시킨 상황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유다가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매를 치신 것이지, 유다가 올바로 서있었음에도 바벨론이 "세상의 공격"으로 쳐들어 온 것이 아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자기가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도 성적이 잘 안 나온 경우, 많은 그리스도인 학생들이 이를 "세상의 공격"으로 생각하고 성적 높은 친구들을 대적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는 세상의 공격이 절대 아니다. 그저 나보다 똑똑하고 열심히 공부한 친구들이 있었을 뿐이다.

여기서 잠시 설교를 옮겨적는 내 생각을 쓴다. 소위 "고지론"의 함정에 빠진 많은 청년들이 이런 우를 범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래, 그리스도인은 무조건 세상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모든 일이 항상 형통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생각. 이런 생각 아래에서는 목표 대학에 떨어지면 그건 세상의 공격이고, 사업에 실패해도 그건 세상의 공격이고, 사랑이 깨져도 그건 세상의 공격이다. 근데 이 고지론이 과연 옳은 말인가? 아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 주님이야말로 처음부터 왕으로 오셔서 순탄하게 사시다 승천하셨어야 한다. 하지만 주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 계시지 않았나?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겪지 않으셨나? 그런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세상에서 제시하는 "등수"는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등수가 아니다. 4.23은 3.95보다 높다? 자격증 다섯 개가 자격증 한 개보다 높다? 970이 830보다 높다? 글쎄, 세상에서는 그럴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제시한 등수가 낮게 나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게 아니라며 얼마나 원망하는가? 우리 주님은 전혀 신경 안 쓰시는 등수인데도 말이다. (물론, 이게 생각만큼 쉽게 마음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등수 하나에 일희일비해 봤으니까. 하지만, 실천은 100% 못 하더라도, 최소한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는 분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설교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의 공격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고난이 내게 찾아왔을 때, 먼저 내가 주님 앞에 바로 서있는지 살펴야 한다. 다니엘은 "아무 그릇됨"도 "아무 허물"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당당하게 세상의 공격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부끄러운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나의 고난이 세상의 공격이 아니라 그 부끄러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회초리일 수도 있으니까.

세상의 공격을 당할 때 두려워하지 말자. 이는 당연한 일이요, 마침내 승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대적들의 함정 앞에서 보란듯이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한다(10절). 그는 세상과 벌이는 영적인 싸움에 기꺼이 뛰어든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공격 앞에서 그리스도인을 지키시고 마침내 승리를 주시는 분이기에, 다니엘은 담대히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 세상의 공격을 받을 만한 자가 되자. 그리고, 그 공격 앞에서 담대하게 싸우자.

이렇게 설교는 마무리되었다. 좋은 설교였다. 특히 아무거나 세상의 공격이라고 갖다 붙이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따끔한 충고가 참으로 유익했다. 하지만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마음 속에 남아있다. 목사님은 "자초해서 받는 고난"과 "그리스도인이기에 받는 고난(세상의 공격)"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는데, 이런 걸 생각해보자. 우리는 종종 거대한 "종교"를 만들고 그 종교 앞에 굴복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신 적도 없는 것들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들"로 만들고 치성 드리듯 그것을 열심히 지켜나간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의 엄청난 죄악, "십자군"을 생각해보자. 십자군을 시작한 자들은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했고, 많은 사람들은 경건한 마음에로 전쟁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자기들이 만든 종교 행위에 불과했다. 그럼 스스로 만든 종교 행위로 인해 고난을 받는 것은 "세상의 공격"인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만든 종교 행위로 인해 받는 고난"과 "그리스도인이기에 받는 고난"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조금 민감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해보자. 어떤 분들은 시청 앞 광장에서 김정일 인형을 태우고 성조기를 흔드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응당 해야 하는 "신앙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분들의 집회가 너무 과격해져서 경찰들이 집회를 해산시키고 그 중 몇을 체포했다고 하자. 이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인이기에 받는 고난"인가? 아니라고? 그럼 이런 건 어떤가? 어떤 분은 복음에 대한 열정이 불타올라서 명동 한복판에서 확성기를 틀고 전도를 하신다. 그런데 그 소리가 너무 크다고 주위 상인들이 항의를 했다 치자. 아니 뭐 조금 더 과격하게, 린치를 당했다고 치자. 그럼 이건 "그리스도인이기에 받는 고난"인가?

어떤 분들은 이 문제들에 대해 너무도 쉽게 답을 내리고 "이게 왜 문제가 되는가?"라며 어리둥절해 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들에 대한 "정답"을 갖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며 부딪히는 많은 고난들에 대해 "그리스도인이기에 받는 고난"인지 아닌지 명확하게 구분할 자신도 없다. 확실히 구분할 줄 알아야 담대히 맞설 터인데, 그렇지 못하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여, 불쌍히 여기사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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