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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십일조 본문

교리

그리스도인의 십일조

로보스 2010. 1. 21. 11:15
[종교] 종교개혁 이야기 2 - 십일조를 알려주마!

위와 같은 글을 발견하고 재미있게 읽었다. 이 글에서는 저 글과 관련해 내가 십일조에 대해 갖고 있는 견해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1. 예수와 십일조
우선 저 딴지 필자가 주장하듯 십일조가 신정국가의 세금에 해당했기에 국가에 대한 세금을 내는 지금에 와서는 낼 필요가 없는지 생각해보자. 복음서에는 예수가 직접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위선자들아!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바치면서 율법 가운데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십일조도 바치고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했다. (우리말성경, 마태복음 23:23)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들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면서 정작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은 무시해 버리는구나. 그런 것들도 행해야 하지만 이런 것들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말성경, 누가복음 11:42)
"박하와 회향과 근채", 혹은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에 대한 십일조를 냈다는 얘기는 진짜 사소한 것에 대해서까지 전부 1/10을 헌금으로 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예수는 이런 것까지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스도인", 즉 예수를 자기 인생의 중심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쉽게 헛소리로 치부할 수 없을 것이다.


#2. 십일조의 기원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에서 십일조는 어떠한 의미였는가? 성경에 따르면, 십일조의 기원은 다음 사건이다.
살렘 왕 멜기세덱도 아브람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멜기세덱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 주며 말했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기를. 당신의 원수를 그대 손에 넘겨 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가지고 있던 모든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주었습니다. (쉬운성경, 창세기 14:18-20)
배경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여기 나오는 '아브람'이 그 유대인의 직계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인데, 이 사람의 조카로 롯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롯이랑 아브람은 따로 떨어져 살았는데, 어느 날 전쟁이 나서 롯이 포로로 끌려갔다. 아브람은 자기가 데리고 있던 사병(私兵)들을 이끌고 가서 승리하고 롯을 구출해 오는데, 오는 길에 이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위에 기술된 사건이 일어난다.

"1/10을 주었다는 점 하나 만으로 이걸 십일조랑 연계시키는 건 무리 아니냐?" 무리 아니다.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사장이 된 레위 사람들은 율법에 따라 백성으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백성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제사장은 자기 백성으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았습니다. 멜기세덱은 레위 지파도 아니었는데 아브라함으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쉬운성경, 히브리서 7:5-6)
히브리서의 기록자는 제사장이 받는 1/10과 멜기세덱이 받은 1/10을 동일한 개념으로 보고 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전자가 바로 율법에서 규정한 십일조다. 따라서 멜기세덱이 받은 1/10을 십일조의 기원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도 하나님께 자기가 얻은 것의 1/10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한다(창 28:22).


#3. 율법 속의 십일조
하지만 이렇게 창세기에 등장한 "십일조"들은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하나님께 바친다"라는 모호한 말들로 기술되어 있고, 그냥 아브라함 혹은 야곱 개인이 스스로 결심한 사항처럼 보인다. 이것이 '제도'로 자리잡는 것은 바로 율법에서이다. 십일조라는 명칭도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모든 작물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다. 밭의 작물이든 나무의 열매이든 마찬가지이다. 그것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다. 그 십분의 일을 되돌려 받으려면, 그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하고 다시 사라. 소 떼와 양 떼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다. 목자의 지팡이 아래로 짐승을 지나가게 하여 열 번째에 해당되는 것은 여호와의 거룩한 짐승이 될 것이다. (쉬운성경, 레위기 27:30-32)

해마다 밭에서 나는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떼는 것을 명심하라. 너희 곡식과 기름과 새 포도주의 십일조와 너희 소와 양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그분께서 자기 이름을 두실 곳으로 선택하시는 그 장소에서 먹도록 하라. 그러면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우리말성경, 신명기 14:22-23)
(덤으로 설명하자면, 레위기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기록한 책이고, 신명기는 모세가 죽기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율법을 정리해서 설명해준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두 내용이 유사하지만 사소하게 다른 부분도 존재한다.)


#4. 십일조의 용처
그렇다면 이 십일조의 용처는 어디였는가?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그들의 땅에서 유산이 없고 그들 가운데서 어떤 몫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네 몫이고 네 유산이기 때문이다. 내가 레위 사람들에게는 이스라엘의 모든 십일조를 그들에게 유산으로 주니 회막을 섬기는 것에 대한 보상이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자손은 회막 가까이 나아와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 죄의 결과를 감당하게 돼 죽게 될 것이다. 오직 레위 사람들만이 회막에서 일하고 회막에 대한 죄를 짊어져야 한다. 이것은 대대로 계속돼야 할 율례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유산이 없을 것이다. 그 대신 내가 레위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예물로 바치는 십일조를 그 유산으로 준다. 내가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유산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말성경, 민수기 18:20-24)
우선 레위인들 월급이었다. 레위 사람들은 "유산이 없고" 대신 다른 지파 사람들이 내는 십일조로 연명하였다. 딴지 필자도 이 점을 지적한다. 이 구절에 이어지는 다음 구절을 보면 레위 사람들도 십일조를 냈는데, 그 십일조는 "아론에게" 주어졌다. 아론은 제사장이므로, 레위 사람들의 십일조로 제사장의 월급을 충당하라는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
3년마다 그 해에 얻은 것의 모든 십일조를 가져다가 너희 성안에 저장하라. 그리하여 너희 성에 사는 몫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과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 주시도록 하라. (우리말성경, 신명기 14:28-29)
또한 이방 사람들, 고아, 과부들을 위한 구제에 사용되었다. (여기에도 '레위인' 이야기가 나옴에 주목하라!) 유대인 성인 남성만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던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들은 전부 사회적 약자들이었고, 그들을 보살피는 일종의 사회 보장 제도로 "십일조"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5. 성경이 말하는 십일조
성경은 종종 "신앙의 회복"을 묘사할 때 율법과 더불어 이 십일조 제도가 회복되었다고 쓰곤 한다. 남유다 왕국의 히스기야 왕 때 그랬고(역대하 31장),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느헤미야 총독 때 그랬다(느헤미야 10장). 십일조는 율법을 상징하는 존재 중 하나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느헤미야 때 십일조를 회복했던 사람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십일조를 등한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그 이후에 활동한 선지자인 말라기 선지자의 통렬한 비판 속에 잘 드러난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칠 수 있을까? 그런데 너희는 내 것을 훔쳤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훔쳤다고 그러십니까?’라고 말하는구나. 너희가 내게서 훔친 것은 십일조와 예물이다. (우리말성경, 말라기 3:8)
이 구절에 이어 한국 개신교회에서 정말 우려먹고 또 우려먹는 위대한 구절이 나온다.
너희가 저주 아래 있다. 너희와 너희 민족 전체가 내 것을 훔쳤으니 창고에 십일조 전체를 가져다 놓고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라. 이 일로 나를 시험해 내가 하늘 창문을 열고 너희가 쌓을 자리가 없도록 복을 쏟아 붓지 않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말성경, 말라기 3:9-10)
이 구절을 근거로 "십일조를 내라! 그럼 쌓을 자리가 없도록 복을 부어 주실 것이다! 할렐루야!" 이게 그들이 강단에서 외치는 주요 논리다. [십일조 → 복 = 재물, 명예, 권력, ...] 이 도식이다.

"성경에 저렇게 써있으면 맞는 거 아닌가? 성경은 무오하다면서?" 그래, 성경은 무오하다. 하지만 이 무오한 성경은 "해석"되어야 한다. 정말 극단적인 문자주의자가 아닌 다음에야 성경의 모든 계율을 하나하나 다 지키며 살지 않는다. 아니, 레위기는 돼지고기 먹지 말라고 했다니까? 목사님, 그럼 어제 삽겹살 드신 거 죄 아닙니까? 구약 시대와 우리 시대는 사회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무엇보다 '신학'이 다르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들고 와서 이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정말 멍청하고 무식한 짓이다.


#6. 십일조의 용처 revisited
그럼 십일조의 용처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십일조는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의 월급이었고, 사회적 약자들을 돕는 구제 방법이었다.

먼저 첫 번째 경우를 살펴보자. 여긴 약간 신학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다. 성경의 논리에 따르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장이 되었고, 이 덕에 근거하여 각 개인이 제사장 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선동가들은 현재의 목사들이 제사장들이라고 주장하던데, 성경을 좀만 읽어봤으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없다. 베드로는 "모든"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며 왕의 제사장입니다. 또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홀로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알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쉬운성경, 베드로전서 2:9)
루터가 말하는 "만인 제사장설"이 이것이다. 예수 이후로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 되었다. 모든 성도가 각자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 (저 딴지 기사 시리즈물의 이전 편을 보면 "오직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목사가 제사장이므로 십일조는 목사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이 옳다는 논리는 "성경에 의해" 반박된다.

다음, 사회적 약자들. 사회적 약자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십일조는 그들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 성경 그 어디에 십일조 받아서 교회 건축하라고 했던가? 성경 그 어디에 십일조 받아서 목사 벤틀리 사주라고 했던가?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조그만 동네 교회의 경우, 목사 자체가 사회적 약자일 수도 있다. 목사의 본업인 설교하고 전도하는 일에 힘쓰다 보면 돈을 못 버니까. 그럼 이럴 때 목사 월급을 십일조에서 충당하는 것은 두 번째 경우, 즉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 여기서 한 가지만 명확하게 하자. 난 십일조의 일부를 목사 월급으로 주는 것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이유'로 "목사가 제사장이므로" 같은 헛소리를 늘어놓지 말라는 거다. "목사가 가난하므로"라면 말이 된다. 그럼, 자연스레 가난하지 않은 목사에게는 십일조의 일부를 월급으로 줄 이유가 사라지겠네?


#7. 결론
정리한다. 내가 볼 때 그리스도인이라면 십일조를 내는 것이 옳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하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무턱대고 말라기 3장 들면서 "우왕 십일조 내면 복 준다 아멘아멘!" 이러고 있으니까 문제인 거다. 십일조가 어디에 쓰이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만약 성경이 가르친대로 십일조가 사용되고 있지 않다면, 교회에 따져서 바꾸든지 아님 제대로 하고 있는 교회로 옮기든지 하는 게 옳다. 아니면 아예 교회에 내지 말고 그 돈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쓰라. 난 그것이 더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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