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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7:11-19

로보스 2018. 11. 20. 12:02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11절)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한 마을에 들어가셨다(12절). 그 곳에는 나병환자 열 명이 있었고(12절) 이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했다(13절). 예수께서는 가서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셨는데, 이들이 가던 중에 고침을 받는 기적이 일어난다(14절).


그 중 한 명이 감격하여 돌아와(15절)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한다(16절). 흥미로운 것은 이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열 명 중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는지 의아해하시며(17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사람이 이방인임을 지적하신다(18절). 그리고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다(19절).


말씀의 배경은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접경 지대였다. 갈릴리는 촌동네였고, 사마리아는 "이방인"의 동네였다(18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11절) 이 변방 동네를 들어가신 것이다. 거기서 나병환자 열 명을 만나신다. 이 나병환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접촉하여 부정을 전염시키지 않으려고 "멀리 서서" 예수께 간구하였고(12절), 나병이 나으면 드리는 정결 규례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14절).


예수께서는 이들을 즉각 낫게 해주시는 대신,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다시 진찰을 받으라는 명을 주신다(14절). 그리고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그들은 치유된다(14절). 자,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어쩌면 나머지 아홉 명의 사람들은 꾸역꾸역 제사장에게까지 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이었던 나병환자 한 명은 즉각 되돌아와 감사를 표시한다(15-16절). 그가 "예수의 발 아래"까지 온 걸 보면 스스로 깨끗해졌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를 칭찬하신다(17-19절).


본문에는 두 가지 종류의 믿음이 나온다. 허황된 것처럼 보이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과, 나은 것을 보았을 때 그것으로 온전하게 되었음을 믿는 믿음이다. 나병환자 열 명은 모두 허황된 예수의 말씀에 순종했다. 즉, 첫 번째 믿음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홉 명에게는 두 번째 믿음이 없었다. 그들은 율법 규정대로 정결 예식을 다 마친 후에야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엄밀히 말해, 사마리아인은 나은 상황에서도 아직 정결 예식을 마치지 않았기에 율법상 깨끗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님은 사마리아인을 칭찬하시고 축복하셨다. 사마리아인의 두 번째 믿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나는 본문이 "마음"의 차이를 대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아홉 명이라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 감사의 마음이 율법 규정의 무게에 눌려 있었기에 그들은 그것을 표출하지 못했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율법 규정은 무시하고(!) 감사의 마음을 마음껏 표현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절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일까?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옷이 벗겨지도록 춤을 추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추하다고 경멸하셨을까? 하나님은 우리의 진심을 보신다. 어제는 감사절이었다. 나는 본문의 사마리아 나병환자처럼 감격에 벅차 감사를 올리고 있는가? 나병을 치료해주신 것보다 더 큰 구원을 이루셨건만, 내 감사는 너무도 절제되어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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