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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1:1-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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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1:1-4

로보스 2018. 4. 3. 09:45

오늘부터 요한일서를 묵상한다. 요한은 생명의 말씀을 직접 경험했다고 말한다(1절). 그리고 그는 그 드러난 생명을 보고 증언하여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했다고 말한다(2절). 이는 결국 그들이 함께 성부, 성자와 사귐을 누리기 위함이었고(3절), 요한은 이를 씀으로써 자신의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한다(4절).


요한일서의 서두는 다른 서신서들의 서두와 사뭇 다르다. 보통 발신인과 수신인을 밝혀 쓰는데(cf. 요이 1, 요삼 1), 요한일서는 그런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서신이 어디로 보내졌는지는 알 수 없고, 발신인이 요한이라는 것도 내적 증거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요한복음, 요한이서와 메시지가 유사한 부분이 있고, 교회의 전승에서 본 서신서의 저작권을 요한에게 돌리고 있으므로 나 역시 그렇게 간주하도록 하겠다.


본문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 이야기한다(1절). 이는 요한복음 1장의 장엄한 서론을 연상시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한이 이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았고, 자세히 관찰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다고 말한다는 데에 있다(1절). 이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되었기에(2절), 요한은 이 말씀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요한은 성육신의 놀라운 비밀을 이야기한다(요 1:14).


하지만 요한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본 것을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말한다(2절). 증언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3절). 이는 쉬이 이해가 가지 않는 표현인데, 어쩌면 요한일서의 독자들이 이방인들이었음을 암시하는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특히 이 사귐이 성부와 성자와 함께 누리는 것이라는 언급(3절)을 볼 때, 혈통상/문화상의 교류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요한은 "이것"을 쓰는 이유가 자신들의 기쁨을 위함이라고 말한다(4절). 여기서 "이것"은 무엇일까? 이 편지 전체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바로 그 직전까지의 세 절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우리의 사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다시 한 번 명확히 씀으로써, 그리고 다시 한 번 되새김으로써, 요한을 비롯한 사람들("우리")은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요한은 여기에서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1-2절)이고, "너희"는 그렇지 않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3절)이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도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수록하여(요 20:29) 직접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격려한다. 베드로 역시 자신의 편지 속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격려한다(벧전 1:8). 아마 당시 교회 공동체 안에 그런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고(또 대부분이 이방인이었을 듯), 오늘 본문의 요한 역시 그들을 격려하고 있다.


나는 예수 이후 2천 년 뒤를 살아가는 이방인이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예수와 무관한 내가 복음을 받게 된 것은, 오늘 본문의 요한처럼 자신들이 본 것을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증거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직접 보고, 그의 음성을 직접 들었으며, 그의 몸을 직접 만졌던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의 증언을 신뢰한다. 오늘 요한이 말하는 것처럼, 이 요한일서를 묵상하면서 당시 제자들과 함께 풍성한 사귐을 누릴 수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 놀라운 복음의 소식을 나 또한 기쁨으로 누리기를 원한다.


주 얼굴 한 번 뵈온 적 없으나

그 눈빛 내게 깃들고

주 손 한 번 나 잡은 적 없으나

그 체온 나는 느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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