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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14:25-3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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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14:25-33

로보스 2013. 4. 21. 01:05

본문은 압살롬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한다. 압살롬은 외모가 출중한 사람으로(25절), 특히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26절). 그는 세 아들과 더불어, 자기 여동생과 같은 이름의 아름다운 딸을 두고 있었다(27절). 이 소개는 훗날 압살롬의 죽음(삼하 18:9-15)을 설명하기 위한 복선이다. 이어 압살롬과 다윗의 화해 장면이 나온다. 압살롬은 2년 동안 왕을 보지 못하여(28절) 요압을 통해 말을 전하려 하나 요압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29절). 이에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고(30절) 성난 요압이 찾아오자(31절) 자신의 요구를 말한다(32절). 결국 압살롬과 다윗은 재회할 수 있었다(33절).


날샘의 묵상과는 달리, 나는 본문이 압살롬을 악인으로 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차라리 내 눈에 더 띄는 것은 다윗과 요압의 어중간한 태도다. 다윗은 압살롬을 불러 놓고는 철저한 심판도 완전한 용서도 하지 않았다. 날샘은 32절의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라는 구절을 압살롬의 무죄 항변으로 보지만, 나는 2년 동안 다윗의 무관심에 지친 압살롬이 이렇게 내버려 둘 거면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외치는 한탄 소리로 느껴진다. 분명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32절).


요압 또한 문제다. 요압은 자신이 압살롬을 불러와 놓고는(삼하 14:23) 다윗이 압살롬을 불편해 하자(삼하 14:24) 압살롬을 버려둔다. 이에 애가 탄 압살롬이 그를 여러 번 불렀음에도 이를 무시했고(29절), 결국 압살롬이 충격 요법을 쓰자 그제서야 압살롬의 청을 들어주었다(30-33절). (나는 날샘의 비난이 못내 불편하다. 다윗과 요압이 자그마치 2년 동안 자신을 내버려 둔 이 상황에서 그럼 압살롬이 어떤 방법을 쓸 수 있었단 말인가?) 요압은 신실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다윗의 눈치만 살피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것(삼하 13:39)을 눈치 채고 압살롬을 데려왔지만(삼하 14:23), 다시 다윗이 압살롬을 멀리 하자(삼하 14:24) 압살롬을 내쳤다.


다윗은 지혜로운 통치자가 아니었고 요압은 신실한 충신이 아니었다. 나는 다윗과 요압의 이러한 태도가 결국 압살롬의 반역을 불러왔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움과 신실함이 있는지 되돌아본다. 결국 참된 지혜와 신실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나온다(잠 9:10, 잠 14:2).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신실한 청지기로서 지혜롭게 행하는 내가 되길 기도한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눅 12: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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