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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온 세상 가운데 널리 퍼진다. 하지만 그 권세와 영광은 만국을 다 포용할만한 것이다(32절). 인간의 타락 이후 점진적으로 이 땅에 스며들어온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오신 것을 기점으로 하여 "추수 때"(29절)에 접어들었다. 이 임박한 심판 앞에서 나는 어느 나라에 속할 것인가?
오늘 본문도 계속해서 비유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본문 이후에 다시 비유가 이어지기 때문이다(막 4:26-34). 특히 이 큰 글줄기를 마무리하는 33-34절을 보면 연속성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첫 번째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의 가치를 "등불"에 빗대어 설명하고 계신다(21절). 비유가 지금은 숨긴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사실 드러내기 위함이다(22절). 두 번째 말씀에서는 이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경각심을 주신다(24절). 말씀을 깨달은 자들에게는 더 큰 은혜가 임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받은 것마저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25절). 나는 내게 주어진 생명의 말씀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되돌아본다. 내게는 깨달음이 있는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더욱 알아가고 ..
본문에서 예수는 비유로 가르치시는 이유(10-12절)를 설명하시고, 씨 뿌리는 자 비유를 해설하신다(13-20절). 이 둘은 분리해서 보아도 좋지만 나는 내적인 연결 고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문을 차근차근 묵상하면서 그 고리를 찾아내길 원한다. 본문 전반부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11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제한되어 있음을 이야기한다. 당시 그 비밀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열두 제자"와 더불어 "함께한 사람들"이었다(10절).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열두 제자만 폐쇄적으로 예수와 가까이 지냈던 것이 아니다! 이들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러 여제자들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마 27:57)이나 다른 무명의 제자들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비밀을 모두에게 드러내지 않은 ..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바닷가에서 큰 무리를 가르치신다(1절). "가르친다"(διδάσκω)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등장하는 걸 볼 때(1-2절), 본문은 예수의 가르침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셨다(2절).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는 외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막 4:11-12). 본문에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내일 큐티에서 해석될 예정이니 내용보다는 그 형식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본문은 "들으라"(3절)라는 단어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9절)라는 문장이 수미상관을 이루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막 4:12을 참조하자면 여기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서 깨닫는 자'를 가리..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본문으로, 마 12:47-50과 눅 8:19-21에도 유사한 평행 구절이 실려있다. 본문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족 그림으로 설명한다.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예수를 찾았다(31절). 이는 아마도 예수가 미쳤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되어 온 것이 아닐까 싶다(막 3:21). 가족을 중시했던 당시 환경에서, 예수 주위에 있던 무리가 걱정스레 예수에게 가족이 왔다고 말을 전한다(32절).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 전혀 생뚱맞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33절) 당혹스러운 대답을 듣고 혼란스러워 하는 무리에게, 예수는 둘러 앉은 자들이 그의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라고 말하며(34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그의 ..
마가복음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행하는 "하나님의 나라" 시위(demonstration)를 그린다. 본문은 축귀 사역에 대한 예수 본인의 설명을 소개하면서 축귀에 대한 신학적 지평을 제공한다. 큰 인기를 구가한(20절) 예수의 축귀 사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어떤 이들은 "미쳤다"고 하고(21절), 어떤 이들은 "바알세불이 지폈다"고, 다른 이들은 "귀신의 왕을 힘입었다"고 하였다(22절). 하지만 이 모든 설명은 틀린 것이었다. 만약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23-26절).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인가? 예수는 27절에서 효과적인 비유를 들어 축귀를 설명한다. "강한 자"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그 강한 자를 "결박"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27절). 이를 ..
오늘 본문에서는 열두 제자를 세우시는 장면이 다뤄진다. 16-19절에서는 이들의 명단이 주어진다. 이름이 일일이 거명되는 것은 성경에서 꽤나 의미있는 일로, 이들이 주님을 무작정 따라다니는 "무리"(막 3:7)와는 차별된 자들이었음을 나타낸다. 이 중요한 자들을 세우실 때 주께서는 (1) 산에 오르사 (2)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고, 이에 화답하여 나아온 자들 중에서 (3) 열둘을 세우셨다. 우선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산"(13절)은 어떠한 곳인가? 내 짧은 식견으로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 율법을 전해주신 곳은 산 위였고(출 19:20), 예수께서 그 용모가 변형되고 하나님의 임재("구름")를 겪으신 곳도 산 위였다(막 9:2-8 외). 또한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가..
날샘의 문단 나누기는 조금 이상하다. 6절은 내용상 지난 본문에 붙었어야 맞는 내용이다. (이것이 개역성경/개역개정의 판단이기도 하다.) 이렇게 나눈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7-12절에 치중하여 오늘 본문을 묵상해보고자 한다. 오늘 본문은 다시금 예수의 사역을 조감한다. 이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예수를 따르던 사람이 '많았다'는 점이다(7절 "큰 무리", 8절 "많은 무리", 10절 "많은 사람"). 이들은 어떻게 예수를 알게 되었는가? 8절은 이에 대해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왔다고 말한다. 이것은 조금 흥미롭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셨다(12절). 물론 본문에서는 이것이 귀신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나와 있지만, 예수께서 나병환자에게도 동일한 명령을 하셨..
다시 한 번 안식일 기사가 소개된다. 따라서 이 본문은 지난 본문과 이어서 봐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지난 본문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가 오늘 본문의 주제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은 "한쪽 손 마른 사람"(1절)을 중심으로 "예수"와 "사람들"(2절)이 서로 대치하는 구도를 그리고 있다. 이 사람들의 관심사는 무엇이었는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2절)였다. 그들은 율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그 규정을 어기는지 지키는지가 최대 관심사였던 것이다. 반면 예수의 관심사는 무엇이었는가? 4절을 보면 예수의 관심사는 "선을 행하는 것", 다시 말해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본문은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벌인 논쟁에 대해 다루고 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유난히 예수께서는 안식일 규정을 자주 어기신다. 굳이 안식일에 고치실 필요 없는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시고, 굳이 안식일에 하지 않아도 될 노동을 안식일에 하신다. 이는 무언가 그 안에 메시지가 숨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길을 열기 위해 이삭을 잘랐다(23절). 바리새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며 예수께 따진다(24절). 예수께서는 다윗의 예를 드시며(25-26절)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씀하시고(27절) 예수께서 안식일에도 주인이라고 하신다(28절).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다윗의 예부터 살펴보자. 다윗의 예는 안식일 규정과 관련..
본문은 언뜻 보면 연결되지 않는 두 가지 이야기를 병치시켜 두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금식 논쟁(18-20절)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옛 것과 새 것의 관계에 관한 설교(21-22절)이다. 우선 각 이야기를 살펴보고 그 연결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보길 원한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께 왜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지 묻는다(18절). 예수께서는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하지 않는 법(19절)이고 신랑을 빼앗길 때에 비로소 금식을 하는 것이라고 답하신다(20절). 이는 "금식"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다. 금식은 슬픔과 괴로움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특히 구약성경의 인물들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길 간구할 때 금식을 하곤 했다(e.g. 삼하 12:16의 다윗). 요한..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함께 하셨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예수를 따르던 "큰 무리"의 정체는 무엇인가(13절)? 그들은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었다(15절). 예수께서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고(14절), 세리의 집에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셨다(15-16절). 예수께서 이들과 함께 하셨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본문 16-17절은 확실한 답을 제공한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로 왔노라" 여기서 가리키는 "의인"과 "죄인"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는 누가복음 18:9-14에 실린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이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스스로 의..
본문은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신 예수께서, 이를 두고 신성모독이라 생각하는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다루고 있다. 흔히 9절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는 질문은 두 가지 말 모두 어렵다는 답을 유발하는 난문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앞뒤 문맥을 살펴보자면 이 구절은 분명 죄 사함을 선포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e.g. 10절 "그러나(δὲ)"). 그렇다면 왜 죄 사함을 선포하는 말이 더 어려울까? 서기관들의 생각대로,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능히 죄를 사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7절). 만약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신성모독"인 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본문은 중풍병자를 예수께 메고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이들은 예수께서 그를 고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로 나아 왔으나(3절)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모인 사람들(2절) 때문에 예수께 접근할 수 없었다(4a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포기할 이 순간, 그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어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께 달아 내렸다(4b절). 예수께서 보신 "믿음"은 이것이다(5a절). 이들은 예수만이 우리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것을 강하게 믿고 있었다. 어떻게 일하실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병자를 예수께로 데리고 가면 예수께서 고쳐주실 것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병자를 예수 앞에 데려다 놓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믿음을 보신 예수께선 무엇을 하셨는가..
참 복음서는 한 구절 한 구절 묵상할 포인트가 많다. 그 중 한 가지만 추려서 묵상하기란 참 쉬운 일이 아니구나.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나병환자 한 사람을 고치시는 내용이 나온다. 날샘은 "전파"에 초점을 맞춰서 본문을 묵상했지만 나는 치유 장면 그 자체에 더 주목하길 원한다.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바라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41절)이 내 마음을 쿵 울렸다. 나병환자와 예수의 말 역시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40절)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41절) 예수께서는 어그러지고 무너진 세상과 그 세상 속에서 고통 받는 인간들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그 세상과 인간이 깨끗해지는 것을 "원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말씀이 육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전도"였다(38절).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찾을 때(37절) 그는 다른 마을로 가서 다른 이들에게 전도하기를 원하였다. 여기서 "전도"는 무엇인가?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해당 단어는 "선포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는 이곳 저곳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라는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 본문은 이 메시지와 함께 귀신들이 떠나갔다고 증언하는데(39절), 이는 이 메시지가 그저 말잔치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맛보여주면서 선포되었음을 나타낸다. 이 메시지는 예수 자신의 것이었는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그를 보내신 분, 즉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전파하셨다(요 7:16). 이를 ..
오늘 본문은 예수의 축귀 및 치유 사역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먼저 시몬의 장모를 고치신 사건(29-31절)이 소개되고 이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일이 등장한다(32-34절). 이는 지난 본문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두 사건 모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예수의 "권위"이다(cf. 막 1:27). 예수께서 열병을 고치신 방법은 복잡하지 않았다.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을 뿐이다(31절). 또한 그는 귀신과 싸우지 않으셨다. 그저 내쫓으셨다(34절). 귀신이 말하려고 할 때 그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실 수 있는 권위 역시 가지고 계셨다(34절).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이 땅의 정사와 권세가 아무리 강해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아들 그 분 앞에서는 순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신 "교훈"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었다(27절). 이 권위는 두 가지 양태로 나타나는데 한 가지는 그 말씀 자체로(22절), 또 한 가지는 그 능력 속에서 나타난다(23-27절).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막 1:15). 이 가르침은 영적인 능력을 수반한다.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던 악한 영들이 떠나가고 병이 치유된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현현을 보여주는 사역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서 어그러진 세상이 고쳐진다(cf. 막 3:27)! 사도 바울은 이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내게는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지 되돌아 본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24절)를 믿고 ..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처음으로 사역을 시작하신 내용이 나온다. 갈릴리에 오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14절). 그 복음은 무엇인가? (1)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과 (2)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으라는 것(15절)이었다. 이 복음의 첫 번째 부분은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래 기다려왔던 보복의 날, 신원의 해(사 34:8)가 드디어 왔다.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눈 앞에 왔다. 누구와 함께? 예수와 함께! 이어 이 복음은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요청한다. 회개하라! 그리고 이 복음을 믿으라! 아마 그 뒤에 "그러면 너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가 생략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
본문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일(9-11절)과 시험 받으신 일(12-13절)에 관해 짤막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두 사건 모두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두 사건 모두에서 "성령"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세례 때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셨고(10절), 그 성령의 인도를 따라 광야로 나가셨다(12절).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인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영 없이 일하지 않으셨다. 이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2:11). 나는 무엇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가? 예수와 함께 하셨던 성령이여, 내 안에도 충만하게 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