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큐티 (1131)
Lovos credit
예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예수를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 하나로 이해했다(28절). 즉 기껏해야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닦는 사람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 그 자신으로 이해했다(29절). 그러자 예수께서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의미를 설명해 주신다(31절). 그리스도, 즉 세상을 구원하는 자는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듯 화려한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서 로마 제국을 쳐부수는 존재가 아니었다. 도리어 그리스도는 "많은 고난을 받고 ... 죽임을 당하"는 존재였다. 마가복음의 다른 본문에서는 이를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사람들은 이것을 깨..
본문은 예수께서 벳새다의 맹인을 고치신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22절). 이 지역적 배경은 어느 정도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의 다른 곳을 참고하면 벳새다는 예수께서 많은 기적을 보이신 곳이지만, 그런 기적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지 않은 불신의 도시이다(마 11:21, 눅 10:13). 오늘은 그 많은 기적 중 한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지난 번 갈릴리 병자의 때(막 7:31-37)와 마찬가지로 맹인을 치유하실 때에도 "침을 뱉으시"고(23절) 환부에 안수하셨다(23, 25절). 이는 온전한 주님께서 자신의 온전함을 그에게 '전이'시키는 것을 상징한다(9/14 큐티 참조). 또한 두 단계로 이루어진 치유는 앞선 본문 막 8:1-21에 소개된 제자들의 태도와 맞물리어 영적 맹인인..
본문의 배경은 다시 "갈릴리 호수"이다(31절). 예수께선 이방인 지역에서 보이셨던 적개심(막 7:27)을 거두시고 다시금 치유 사역을 시작하신다. 오늘의 치유 사역은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32절). 예수께서 그를 고치시는 장면은 이해하기 어렵다. 먼저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셔서 치유를 하셨다(33절). 그 치유 장면을 살펴보자면, 예수께서는 장애가 있는 부위에 손을 대셨고, 침을 뱉으셨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라고 말씀하셨다(33-34절). 그러자 바로 장애가 나았다(35절). 과연 각 순서의 의미는 무엇일까? 모두 살펴보기는 좀 어렵고, 여기서는 '침을 뱉으신' 행동의 의미를 잠깐 살펴보자. 어떤 분들은 침은 입에서 나오므로 말씀을..
이번 본문은 난해하다. 특히 전통적인 유대교 관점에서 "자녀"가 아니라 "개들"의 신분인 내가 이 본문을 어떻게 읽어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는 사실 쉽지 않은 문제다. 어떤 목사님은 27절의 말씀이 예수의 본심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독심술을 써야 하는 성경 석의가 옳은 걸까? 난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편견 없이 살펴보고, 이를 내 삶에 적용해보련다. 본문의 배경은 "두로 지방"이다(24절). 날샘이 주석에서 설명하고 있듯 두로 지방은 지중해에 면한 이방 지역이었고, 그 곳에서 예수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인 이방인 여인을 한 명 만난다(25-26절). 여기서 본문이 한 가지 강조하는 것이 있다. 예수는 두로 지방에서 자신이 온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
본문의 구조는 비유와 그 풀이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구조는 마가복음 전체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구조인데, 특히 두 말씀의 청자가 다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문의 비유는 "무리"(14절)에게 하신 말씀이고, 풀이는 그들이 떠난 후 "제자들"(17절)에게 하신 말씀이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면서도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14절)는 말씀을 덧붙이셨다는 점이다. 즉 비유는 '듣는 귀 있는' 자는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이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자 실망하신 것처럼 보이는 것(18절)도 이해가 된다. 예수께선 제자들을 이해력 있는 자들로 훈련시키고 싶으셨던 것이다. 이런 배경을 깔아두고 비유의 내용을 살펴보자.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
어제에 이어 오늘 본문도 "전통"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날카롭게 "너희 전통"과 "하나님의 계명/말씀"을 대조하고 있다(9, 13절). 특별히 본문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예로 들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단순한 하나님의 계명(10절)을 지키기 싫어 자신의 행동을 '신학적으로' 합리화하는 인간의 간사한 모습을 드러낸다(11-12절). 이게 끝이 아니다. 우리는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한다(13절). 그렇다. 하나님의 계명은 단순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순종도 단순하면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회의 "전통"은 처음에는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전통을 악용하여 불순종을 합리화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13절)이라는 경고를..
본문의 핵심 단어는 "전통"이다(3, 5, 8절). 예수께서는 이 전통에 대해 무척 부정적으로 생각하신다. 전통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외식하는 자"요(6절),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이다(6-7절). 왜 예수께서는 이렇게 전통에 부정적이실까? 주류 기독교는 전통 -- 초대 교회 전통, 칼뱅 전통, 웨슬리 전통 -- 을 강조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아이러니다. 예전에 박희원 목사님이 '종교'에 관해 설교 시간에 설명해주신 것이 떠오른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겁을 준다. 으리으리한 신상과 화려한 의례, 그리고 복잡한 규율을 제시하여 사람들이 그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두려움에 떠밀려서 종교를 따른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런 종교와는 다르다. 기독교의 핵심..
본문은 예수의 권능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바다 위를 걸으셨고(47-51절) 병자들을 고치셨다(56절). 이는 물론 그의 하나님 되심을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이 권능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었는가이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신 것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이를 돕기 위해 가신 것이었다(48절). 마찬가지로 병든 자를 고치신 것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예수의 사역은 '구원'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나는 예수를 보고 소리 지르는 제자들인가, 간구하는 사람들인가? 구원을 위해 오신 그 분께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나를 구원하소서, 오 주님.
오늘 본문은 직전 본문에서 다뤄진 예수께서 "큰 무리를 보시고 ... 불쌍히 여기사" 가르치셨다는 기사(막 6:34)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다루고 있다. 이는 하나님 나라를 또 한 번 맛보여 주신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께 가르침을 받은 큰 무리를 앞에 두고, 제자들은 이들을 흩어 배를 채우게 하자고 말한다(36절). 그러자 예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명하신다(37절). 제자들의 첫 제안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제안은 무리를 긍휼히 여기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 대답에 담긴 "너희가"라는 단어에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 통치자로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제자들은 이미 전..
잠시 세례 요한의 이야기(막 6:17-29)로 샜던 마가는, 다시 예수의 사역으로 돌아온다. 오늘 본문은 막 6:13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다. 제자들은 예수께로부터 권능을 받은 후 나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쳤다(막 6:12-13). 그리고 예수께로 돌아와서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했다(30절). 이야기를 들은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휴식을 주신다(31절). 이는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창 2:2, 출 31:17)과 같은 맥락에 있다. 성실히 일한 일꾼은 그 다음 일을 위해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와 제자들은 휴식을 취하러 배를 타고 이동한다(32절).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졌다. 그들의 이동을 본 사람들이 그들을 쫓아간 것이다(33..
우울한 이야기니까 내용 요약은 생략. 헤로디아는 즐거워하고 요한은 목이 베였다. 악한 자들은 낄낄거리고 선한 자들은 괴로워 한다. 악이 성하고 선이 쇠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본문이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 현실이다. 하지만 문맥을 살펴보자면 이는 '액자식 구성'으로 예수의 사역 사이에 삽입된 이야기임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암담한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세상이다!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도 모르게 점점 커져서 결국 이 세상을 집어 삼킨다(막 4:26-32).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다. 주여, 보이는 절망 속에서 보이지 않는 소망을 붙들게 하소서.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고통에 차 있다.하지만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다. - 카를 바르트
본문은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로 시작된다(14절). 이는 앞선 12-13절에서 제자들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증거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가 유명해지자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였고 어떤 이는 선지자라고 하였지만(15절; 엘리야에 관해서는 말 4:5 참조), 이야기를 들은 헤롯은 세례 요한이 부활했다고 생각하였다(14, 16절). 이어 본문은 헤롯과 세례 요한의 악연을 소개한다. 헤롯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였는데(17절) 요한은 이것이 하나님의 법에 어긋난다고 경고하였다(18절). 여기서 요한은 전통적인 선지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말을 듣고 헤롯은 번민하였지만(20절), 헤로디아는 요한을 미워하였다(19절)..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는 장면을 다루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능은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이었고(7절), 그 권능을 받은 제자들은 나가서 예수께서 하신 사역을 그대로 수행하였다(12-13절). 이는 제자들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에 능동적으로 동참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들을 파송하실 때 내리신 명령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쉬이 짐작하기 어려운 명령들이 많다. 이들을 살펴보면서 그 안에 담긴 깊은 의미를 찾아내길 원한다. 먼저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둘씩" 보내셨다(7절). 이는 눅 10:1에서 70인을 파송하실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 원칙이었다. 단순히 생각해서 가장 효율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씩 보내는 것이었을 텐데, 굳이 둘씩 보내신 이유가 있을..
본문은 예수께서 고향으로 내려가셔서(1절) 가르치실 때(2절)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자들은 분명 예수께서 베푸시는 "지혜"와 "권능"을 보았다(2절). 하지만 그들은 예수에 대해 너무 익숙했고, 결국 그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배척하게 되었다(3절). 예수께서는 이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고(5절),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시며 그들을 떠나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셨다(6절). 이 이야기의 메시지는 명백하다. 예수가 익숙했던 자들은 자신의 틀에 갇혀 예수를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도 바로 이 '익숙함'이다. 내가 알고 있던 하나님, 내가 알고 있던 예수님, 내가 알고 있던 성령님의 모습에 빠져..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키워드도 "믿음"이다.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6절)라고 하신다. 무슨 말인가?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할 수 있음을 믿으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다(롬 4:17). 이를 정말로 믿는가? 죽은 자 같은 내 삶이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가?
본문은 예수의 치유 사역을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제 배경은 호수의 "맞은편", 즉 갈릴리 지방이다(21절). 본문은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회당장 야이로의 딸 이야기(막 5:21-24; 5:35-43)가 바깥쪽 내용이고, 혈루증 여인 이야기(막 5:25-34)가 안쪽 내용이다. 본문은 핵심 단어는 "구원"이다. 이 단어는 23절, 28절, 34절의 세 군데에서 사용되었는데, 헬라어 원 단어(σῴζω)는 "구원"과 "치유"의 두 가지 의미를 다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는 치유의 의미로 번역) 본문에서는 "치유"의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의미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셨다(34절). ..
오늘 본문은 흥미롭게도 예수께서 "함께 있기를 간구"한 자(18절)에게 도리어 집으로 돌아가 이 일을 알리는 사명을 주셨다(19-20절)고 이야기한다. 이는 매우 이례적으로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예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기를 원치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e.g. 막 1:44) 제자들에게는 자신을 따르라고 명하셨던 분이기 때문이다. 왜 이러한 차이가 났을지 고민해 보던 차에, 혹시 지역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통 예수의 사역이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것에 비해(공관복음의 서술), 이번 사건은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막 5:1)에서 벌어졌다. 마가는 확실히 이 지역을 '다른' 지방으로 보고 있다(17절). 이 지역은 어떠한 곳인가? 요단강 동편에 위치한 거라사는 본디..
오늘 본문은 지난 본문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다시금 귀신의 엄청난 능력과, 이와 대조적으로 그 능력을 누르실 수 있는 예수의 권능이 조명된다. 먼저 예수의 권세 앞에 귀신의 정체가 드러난다. 예수께서 그 이름을 물어보시자 귀신은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9절). 귀신은 하나가 아니었다. "군대"라 불릴 정도로 많은 귀신들이 한 사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귀신들은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돼지의 큰 떼"(11절)에게로 들어가 2,000 마리 가량의 떼를 몰아 바다에 몰사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13절). 그렇다면 이 악한 귀신들이 사로잡고 있었던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하지만 다시금 예수의 권세 앞에 이 귀신들은 힘없이 무너진다. 본문은 귀신이 얼마나 예수 앞에서 벌벌 떨었는지 보여..
오늘 본문은 거라사인의 지방(1절)에서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 들린 자를 만난 이야기(2절)를 들려준다. 비록 한국 교회에서 귀신론은 금기처럼 되어버렸지만, 본문이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귀신의 속성을 살펴봄으로써 더 나은 신앙인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본문은 귀신을 "더러운 귀신"으로 소개한다(2절). 그의 특징은 무엇인가? 귀신 들린 사람을 "무덤 사이"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3절). 이는 사실이기도 하겠지만 어느 정도 상징성 또한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덤은 죽음의 냄새가 맴도는 곳이다. 귀신, 즉 악한 영은 사람을 그곳으로 몰고 간다. 이는 5절에서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귀신 들린 사람은 "자기의 몸을 해치"게 된다(5절). 요컨대, 더러운 귀신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자기의..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물결을 잔잔하게 하신 기적을 이야기한다. 바닷가에서 배에 올라 가르치시던 예수께서는(막 4:1) 저물 때가 되어 바닷가 저편(실제로는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길 원하셨다(35절).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제자들"(35절)과 "무리"(36절)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모시고 건너편으로 향하였다(36절). 배를 타고 가던 도중, 큰 광풍이 일어나 배가 가라앉을 지경에 놓이자(37절)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께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38절). 예수께서는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셨고(39절)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다(40절). 이 이야기가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그 교훈이 41절에 의문형으로 잘 나타나있다. "그가 누구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