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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 "지금 구원하소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소리 높여 외쳤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조상 다윗의 나라를 기대했다 하지만 구원은, 메시아는, 다윗의 나라는,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임하지 않았고 이에 분노한 그들은 그를 못박았다 그리고 온 땅에 구원이 임했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신 주님(1절)은 왕의 모습으로 나단의 신탁(삼하 7:8-16)을 성취하신다. "주가 쓰시겠다"라는 권위 있는 한 마디(3절)에 주님의 탈 것이 징발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위대한 권위와 대조적인 '나귀 새끼'의 초라한 모습이다. 이는 스가랴 예언(슥 9:9)의 성취로, 스가랴는 이를 가리켜 왕이 겸손하기에 나귀 새끼를 타신다고 설명한다. 우리 왕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요,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취할 수 있는 분이시지만, 영광스러운 왕도(王都) 입성 때조차도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셨다. 그의 이 겸손함은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룬다. 주의 뒤를 따른다는 나는 그의 겸손함을 본받고 있는가?
바디매오는 무엇을 원하여 "소리 질러 이르"고(47절)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고(48절)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갔는가(50절)? 그의 요청은 간명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51절) 나에게는 이와 같은 간절함이 있는가? 주여, 내가 주를 보기를 원하나이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그 영광 중에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청을 드렸다는 사실(막 10:37)이 알려지자 다른 제자들이 분노했다(41절). 아마 질투에서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불러다가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께서는 이 가르침 속에서 "이방인의 집권자들"(42절)과 "너희"(43절)를 대조하신다. 이방인의 집권자들, 즉 세상의 권세는 자신의 신민을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린다(42절). 하지만 "너희", 즉 예수의 제자들은 "섬기는 자"여야 하고(43절) "종"이 되어야 한다(44절). 어째서 그런가? 그들의 스승이자 주(요 13:14)인 "인자"께서 죽기까지 섬기셨기 때문이다(45절).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제자들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처럼 되기를 원했고 장차 그렇게 될 것을..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은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이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38절)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결국 예수께서 마시는 잔을 마시며 예수께서 받는 세례를 받게 될 것(39절)이라는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뒤를 따랐다. 예수의 뒤를 따르는 자라면, 그가 마시는 고난의 잔과 그가 받는 치욕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일 다 할 수 있나주가 물어보실 때용감한 자 바울처럼선뜻 대답하리라
오늘 본문은 또다른 수난 예고를 담고 있다. 특히 32절 전반부는 이후에 일어날 일을 요약하는 문장으로, 다른 구절들의 도움을 받아 특별히 이 문장을 찬찬히 묵상해보길 원한다. 먼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라는 표현을 살펴보자. 다윗 성이라 불리었던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왕의 즉위식을 상징한다. 마가는 "올라가다(ἀναβαίνω)"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 길이 영광스러운 길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예수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실상 고난과 죽음을 의미했다(33-34절). 그의 즉위식은 왕좌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이 얼마나 큰 아이러니인가? 그런데 그 길에서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셨다. 예수께서는 고난과 죽음의 길임을 아심에도 앞장 서서 그 길을 걸어가신 ..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무엇을 버리면(29절) 현세에 백 배나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는 주님의 약속.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내세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 "백 배나" 임하는 그것(30절)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 나라를 미워하기에 우리는 "박해를 겸하여" 받게 될 것이다(30절). 박해를 겸하여 받는 하나님의 나라, 나는 그것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
지난 본문에 등장한, 재물이 많은 사람의 이야기에 이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베푸신다. 지난 본문과 이어 보면 영생을 얻는 것(막 10:17), 하늘의 보화(막 10:21),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23, 24, 25절), 구원을 얻는 것(26절)이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먼저 주목하자. 오늘 본문의 구조는 A-B-A'-B'-C의 구조이다. 먼저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점을 말씀하시자(23절, A) 제자들이 놀라고(24a절, B),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강조해서 말씀하시자(24b-25절, A') 제자들이 다시 한 번 놀란다(26a절, B'). 여기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제..
익숙한 본문일수록 이미 나에게 주입된 해석틀로 해석하기 쉽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은 내 선입견을 버리기 정말 힘든 본문이다. 과연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꼼꼼하게 본문을 따라가면서 오늘의 말씀을 받기 원한다. 예수께서 가르침을 마치시고 길에 나가셨을 때, 한 사람이 예수께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물었다. "선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7절) 본문은 이 사람의 태도가 매우 급박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선한 선생님"을 만나 질문을 던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 절박한 질문에 의외의 답을 던지신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18절) 이 "선하다"(ἀγαθός)라는 단어는 마가복음에서는 이 본문에서만 사용된다. 그것을 볼 때 마가가 ..
최근 묵상한 여러 본문을 돌이켜 보면, 마가복음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에 대한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을 소개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이 질문을 좀 더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다음 본문으로 이어져, 부자 청년의 에피소드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막 10:24)가 드러난다.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누구인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언급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선포하신다(14절). 이는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고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이다(15절). 그렇기에 예수께선 제자들이 거부했던(13절) 어린아이들을 안고 축복하셨다..
예수께선 갈릴리(막 9:30)를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셨다(1절). 그곳에서도 무리는 모여들었고, 예수께서는 그 무리를 가르치셨다(1절). 이 짤막한 기사 안에도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예수께서는 항상 가르침을 베푸셨다는 내용을 읽어낼 수 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혼에 관하여 질문하였다(2절). "시험"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이혼을 허용하든 금지하든 트집 잡을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혼이 허용된다고 하면 극단적인 예를 취하여 문란한 자라고 주장할 수 있었고, 금지된다고 하면 모세의 율법에 어긋난 가르침을 베푼다고 고소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를 아시고 먼저 율법을 물으신다(3절). 이에 대해 그들은 율법이 이혼을 허용하고 있다고 ..
어제 본회퍼의 마태복음 5장 강해를 읽었는데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을 또 큐티로 만나다니... 아무래도 하나님이 나한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 보다. 본회퍼는 자신의 책 에서 말한다. 예수께서 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손과 발, 눈을 제거해 버리라고 하신 말씀에 담긴 의미는 어떤 것인가?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가? 왜 우리는 그 명확한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신학적"으로 다른 해석을 만들어내고 예수의 말씀을 변형시키는 걸까? 결국 이 합리화는 내 죄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내 죄는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살다보면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죄(와 그 근원)를 단호하게 처리하는 것은 '죄 없으신'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죄와 함께 살겠노라." 과연 이것이 나를 제자..
오늘 본문은 앞선 본문의 내용이 어느 정도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섬김의 도'에 대해 가르치신 내용이 다루어졌다. 특히 "누구를 섬겨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어린아이 하나"(막 9:36)를 보이시며 가장 약하고 가장 낮은 자를 섬기라는 가르침을 주셨다는 점에 주목하며 본문의 내용을 분석해 본다. 오늘은 먼저 "'우리 편'이 아닌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주제가 다루어진다. 우리를 따르지 않는 자까지 우리가 섬겨야 하는가, 아니면 배척해야 하는가? 요한은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예수를 빙자하여 귀신을 쫓는 자들을 보고 그들을 배척하고자 했다(38절). 예수께서는 이에 대해 분명한 답을 주신다. "금하지 말라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
오늘 본문은 크게 세 개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고난에 대해 가르치신 이야기(30-32절)가 등장하고, 이어 첫째가 되는 길에 대한 가르침(33-35절), 그리고 어린아이에 관한 이야기(36-37절)가 나온다. 먼저 예수께서는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시면서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으셨는데(30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31a절).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가르치셨다(31b절).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32절). 가버나움에 도착하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길에서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물으셨다(33절).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를 따졌기에 잠잠하였고(34절),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셨고, 아이는 귀신으로부터 구원을 얻었다(25-27절). 다시 한 번 악령들조차도 예수의 권세 앞에서는 복종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본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이 세상 속에서 그 세력을 확장한다. 하지만 제자들은 어째서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는지 궁금해 하였다(28절). 그들은 이미 과거에 귀신을 쫓으며 사역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막 6:12-13)? 그러자 예수께서는 짧게 답하신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29절) '이런 종류'는 무엇을 말하는가? 맥락을 살펴볼 때 '이런 종류의 기적', 혹은 '이런 종류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앞의 내용과 종합하여 살펴볼 때,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을 ..
예수 앞에 아이를 데려오자, 귀신은 예수를 두려워하며 아이에게 발작을 일으켰다(20절).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며 그 아버지에게 이 병에 관해 물으셨고(21절), 아버지는 이에 대한 답을 한다(21-22절).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대화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22절)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구는 많은 병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 아버지의 간구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조건절에 이의를 제기하신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23절) 이 아버지는 예수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만약 당신이 능력이 있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다. ..
본문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제자들"과 "큰 무리", 그리고 "서기관들"이다(14절). 무리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요구하였다(17-18절). 하지만 제자들은 그 일을 하지 못했고(18절), 그저 서기관들과 더불어 변론할 수 밖에 없었다(14절). 아무런 변화도 없고 아무런 소망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온 무리가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였다(15절). 여기 매우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한다. '매우 놀랐다(ἐκθαμβέω)'는 동사와 '달려왔다(προσδρέμω)'라는 동사이다. 헬라어 사전을 찾아보니 '매우 놀랐다'는 단어는 놀라움이나 괴로움 등 감정에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를 가리킨다(막 14:33; 16:5-6). 따라서 여기서 '매우 놀랐다'..
제자들은 예수의 고난과 세례 요한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예수의 고난이 어떠한 의미인지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가.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한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있는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 의미를 이해하는 내가 되길 기도한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형 사건이 고난에 관한 가르침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사랑하는 아들"이라 칭하셨고, "그의 말을 들으라"는 명령을 제자들에게 내리셨다(7절). 그 사랑하는 아들이 이 땅에 와서 "그리스도"로서 고난을 당한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의 말은 무엇인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34절) 십자가를 지고 매일 주를 따라가는 내가 되길.
오늘 본문은 지난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의 의미를 풀어 설명하시자(막 8:31) 베드로가 이에 항변하였고(32절) 예수께선 그를 꾸짖으셨다(33절).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탄"이 주는 생각이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도를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34절) 제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을 다시 걷는 사람이다. 그 길은 고통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요, 마치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괴로움이 함께 하는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그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