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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를 다녀왔다. 자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일단 큐티는 마치고... "동역자"(17절)란 무엇인가? 바울은 오네시모가 끼친 피해를 자신이 갚을테니(18-19절), 오네시모를 바울처럼 대해 달라고 청한다(17절). 이는 바울에게 기쁨과 평안을 줄 것이다(20절). 동역자란 그런 것이다. 들어주기 어려운 청조차도 상대방의 기쁨과 평안을 위해 들어줄 수 있는 존재. 그 뿐인가.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리라 확신했다. 심지어 그보다 더한 것도 할 것이라 생각했다(21절). 그렇기 때문에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에게 돌려보낸 것이다. 동역자란 그런 것이다. 직접 대면하여 설득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존재. 그리고 바울은 빌레몬을 다시 만나보길 원했다(22절). 바울과 함께 한 자들도..
이런 곳에 오니 바쁜 와중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은혜가 참 귀하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한다(13절). 하지만 그것이 "선한 일"이었음에도(14절), 바울은 억지로 빌레몬을 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선한 일은 "자의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14절). 이제 수련회가 하루 남았다. 나와 함께 일하는 이들이 자원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더욱 그들을 신경 써서 배려하며 챙겨야겠다. 내 생각에 더 좋은 방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에게 걸림이 된다면 바로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꾸역꾸역 하는 큐티. 세상은 "마땅한 일"(8절)로 가득 차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그것조차 "사랑으로 간구"할 줄 알아야 한다(9절). 사도였던 바울은 오네시모를 빼앗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를 돌려 보내며(12절) 빌레몬에게 사랑으로 간구한다(10절). 지금 수련회장에서 많은 부조리와 비합리를 보지만, 비판하고 따지기보다 먼저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내가 되길 원한다.
바울의 중보 기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빌레몬이 "사랑과 "믿음"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5절). 이는 개인 층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믿음을 가지고 "교제"했을 때(NIV는 sharing your faith라고 번역), 이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게 하는 역사를 불러왔다(6절). 또한 그가 사랑을 나눌 때 성도들은 평안을, 바울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7절). 그가 집을 교회로 제공한 것(2절)도 이러한 사랑과 믿음의 공적 표현이었을 것이다. 내일부터 2박 3일간 수련회가 시작된다. 내게는 봉사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 자리에서 빌레몬처럼 내 믿음과 사랑을 수련회에 참석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었다(15절). 그리고 제자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나가 두루 전파"하였다(20절). 마가복음은 그 때 예수께서 함께 역사하셨다고 말한다. "따르는 표적"이 바로 그 증거였다(20절). 나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가? 내 삶에서 표적이 드러나고 있는가? 예수의 이름으로 악한 세력을 몰아내고 있는가?
이제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의 행적을 증언한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9절) 누구에게 나타나셨는가? 첫 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였고(9-11절), 두 번째는 제자 두 명이었다(12-13절). 그리고 마침내 열한 제자가 모두 모여있을 때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14절). 앞의 두 사건은 유사한 패턴을 띠고 있다. (1) 예수께서 누군가에게 나타나셨고 (2) 그것을 본 사람이 가서 말로 전하였지만 (3)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는 패턴이다. 예수께서는 마침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다(14절). 마가복음이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14절)이 얼마나 큰 불신인..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고대 사본의 마지막 부분이다. 십자가 사건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그리고 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예수를 따랐던 여제자들(cf. 막 15:40-41)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1절). 그리고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즉 합법적으로 노동을 할 수 있는 날이 되자마자,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2절) 예수께서 묻히신 무덤으로 향했다. 바로 직전 본문에서 배경이 "안식일 전날"(막 15:42)이었음을 인식하면, 이 날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사흘째 되는 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마가복음 14-15장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사흘"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다(cf. 막 14:58; 15:29). 하지만 그 무덤에는 문제가 있었다. 무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당돌히" 빌라도에게 가 예수의 시체를 요구했다(43절). 그는 그 시체를 받아다가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었다(46절).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른 것이다. 요셉이 다음 날이 아니라 "저물었을 때"에 빌라도를 찾아가 시체를 요구했다는 것(42절)을 주목하라. 이는 다음과 같은 율법을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신 21:22-23) 요셉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다(43절). 그는 율법에 규정된 올바른 일을 거침 없이 행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예수께서 돌아가시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38절). 이는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고 있는 벽이 사라져 하나님 앞으로 바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드려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바로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고 논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백부장이 고백한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39절) 마가복음이 증언하고자 하는 주제가 여기 함축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셨다. 그 성취의 절정은 십자가 사건이었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누구나 하나님 앞에 바로 나아..
드디어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이다. 해조차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다(33절). 예수께서는 시편 기자의 탄식을 내뱉으신다(34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하나님이 그 아들을 버리셨다. 모든 저주가 그 몸 위에 임하였다. 이 극적인 순간에조차 인간들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가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했다(35절). 엘리야는 당시 사람들이 기다리던 또 하나의 구원자였다(말 4:5-6; cf. 막 9:11-13). 이들은 예수가 그 구원자를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롱조로 말한다.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36절) 여기서도 이들이 어떻게 '구원'을 이해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그들에게 구원은 "그를 내려..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조롱 받으시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는 만방에 "유대인의 왕"으로 선포되었다(26절). 하지만 그의 양쪽에는 위엄 있는 신하들이 도열하는 대신 "강도 둘"이 함께 못 박혀 있었을 뿐이다(27절). 그리고 만백성이 그 앞에서 절하는 대신, "지나가는 자들"(29-30절)과 "대제사장들"(31-32절), 그리고 심지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32절)은 그에게 조롱과 모욕을 던졌다. 조롱하는 자들의 말을 살펴 보면, 그들이 은연 중에 진리를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나가는 자들은 예수에게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말을 던진다(29절). 이는 결국 성전 되신 예수의 육체가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 성취가 되었다(요 2:19-22). 또한 대제사장들과 ..
드디어 골고다 언덕 장면이 등장하였다. 골고다는 "해골의 장소"라는 뜻을 가진 곳(22절)으로, 원래 사형이 주로 이루어지던 곳이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예수께서는 이 "해골의 장소"에서 끔찍한 고통을 당하신다. 예수께서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받지 않으시고(23절) 그 모든 고통을 몸소 체험하셨다. 그가 받은 고통이 얼마나 극심하였는지는, 그가 십자가를 몸소 질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에서부터 유추할 수 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던 것이다(21절). 예수께서는 그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고(24, 25절), 군병들은 그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그 옷을 나누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4-25) 집 주인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었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겠는가. 더한 조롱과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걷길 원한다. 그는 실로 "유대인의 왕"이셨기에.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14절) 하지만 그는 결국 예수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었다. 그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15절). 그는 무리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정의를 저버렸다. 내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님의 정의를 따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게 되길 원한다.
본문은 이제 장소를 옮겨 총독 관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우선 눈에 띄는 건 예수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극심한 증오이다. 그들은 고발할 거리를 찾자마자 "즉시"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넘겨 주"었다(1절). 이들이 얼마나 발 빠르게 움직였는지 암시하는 표현이다. 또한 그들이 찾아낸 죄목은 신성모독 한 가지였음에도, 빌라도 앞에서는 "여러 가지로 고발"하였다(3절). 어떻게든 예수를 죽이겠다는 극렬한 증오심이 드러난다. 2절부터 5절에서 오고가는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는 막 14:60-62에 기록된 대제사장과 예수의 대화를 떠오르게 한다. 예수는 두 경우 모두 동일하게 반응하셨다. 빌라도나 대제사장이나 예수에게 스스로를 변호하라고 요구하였다(4절, 막 14:60). 이에 대해..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7절)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69절)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70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말을 듣고 예수의 도당이라 불리는 순간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겠는가. 하지만 목숨의 위협 앞에 수제자 베드로조차 힘없이 무너지고 만다. 누군들 그 앞에서 버틸 수 있겠는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앞에서 주를 부인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딤후 2:11-12)
드디어 끈질긴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죄목을 찾아냈다. 오늘 본문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저열한 공격과 그에 대비되는 예수의 침묵이다. 대제사장은 예수의 항변을 듣길 원했다(60절). 하지만 예수께선 침묵하셨다(61절). 이는 이사야의 예언을 떠오르게 한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그는 수많은 공격 앞에서도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았다. 대제사장은 좀 더 직접적인 공격을 가한다. "네가 그리스도냐?"(61절) 예수께서는 이를 인정하신다(62절). 기회를 엿보던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 일사천리로 사형 선고를 내린다(64..
오늘 본문은 예수의 고발 장면을 통해 예수께서 무죄한 분임을 잘 보여준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했다는 증언(55절)을 보라. 예수를 죽이기 위해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이 떼로 모여 증거를 찾아도 서로 일치하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56절). 율법에 비추어 봐도 예수는 무죄한 분이었던 것이다! 마가는 여기에 의미심장한 거짓 증언을 하나 덧붙인다. 예수께서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는 증언이다(58절). 흥미롭게도 지금까지 마가복음에서는 이 말씀이 등장한 적이 없다. (이후에 한 번 더 등장한다 -- 막 15:29) 마가가 이 말씀을 여기 예수께서 수난 받으시는 장면 중에 삽입한 ..
예수를 잡으려는 무리는 "검과 몽치"를 들고(43절), 예수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은 "칼"을 들고(47절) 서로 대치한다. 그 무력과 무력이 대결하는 자리에서, 예수께서는 무력하게 잡혀가신다. 과연 그가 능력이 없어서 잡히신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인 그는 천사들을 불러 대적하실 수 있었지만(마 26:53), "성경을 이루"(49절)기 위하여 그저 순종하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길이요,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예수를 따라 내 힘과 능을 내려놓고 순종할 수 있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