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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새로운 비유를 도입한다. '법'과 '간음'의 비유이다. 법은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만 그에게 영향력을 미친다(1절). 따라서 결혼한 부부를 관장하는 법은 둘 중 하나가 사망하는 순간 그 효력을 다한다(2절). 둘 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한 쪽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간음'이 되지만, 한 쪽이 사망한 상태에서 그 배우자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상관이 없다(3절). 바울은 이 비유를 사용하여 율법과 우리, 그리고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한다. 본래 우리는 율법에 매여있는 상태였다(5절). 6장에서 이미 논한 바와 같이, 그 상태에서는 "사망"의 열매 밖에 맺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예수로 인하여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4절), 더 이상 율법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한다(6절). 이제 우리는 "다른 ..
바울은 지난 본문 마지막 절을 이어 '종'의 언어를 사용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이 언어는 "사람의 예대로 말하"는 것으로, 영적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독자들을 위한 비유이다(19절). 우리는 죄의 종이었으나 복음으로 인해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17-18절). 바울은 죄의 종일 때와 의의 종일 때의 삶을 비교한다. 죄의 종일 때는 몸을 부정과 불법에 내주었고(19절) 의와 상관 없이 살았다(20절). 그리고 그 마침은 사망이었다(21, 23절). 반면 의의 종이 되면 몸을 의에게 내주고(19절)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가 죄를 따르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는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에(14, 15절) 죄가 우리를 주장할 수도 없고, 따라서 우리가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즉, 우리가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신분상 죄의 지배를 벗어났기 때문에 더이상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다는 핑계를 댈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신분을 재규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순종하는 대상의 종이 된다. 죄의 종이 될 것이냐, 아니면 의의 종이 될 것이냐(16절)? 죄의 종이 되는 길은 "몸의 사욕에 순종"하는 것이요(12절), 의의 종이 되는 길은 자신을 부활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13절). 지난 본문의 고민이 여기서도 계속된다. "몸의..
본문은 지난 본문에서처럼, "죄가 클수록 은혜가 크다면, 우리는 더 큰 죄를 지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다루고 있다. 지난 본문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세례 받을 때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오늘 본문이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은 것은 "죄의 몸이 죽"은 것을 의미한다(6절).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칭의를 받은 존재이다(6-7절). 지난 본문의 마지막 부분(롬 6:4)에서 부활을 언급한 바울은, 그와 함께 연합하여 죽은 자는 그와 함께 연합하여 부활할 것이라고 선포한다(5, 8절). 여기서 바울은 예수를 우리의 모범으로 보고 있는 듯 하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자 더 이상 사망이 그를 지배할 수 없었다(9절). 그는 죄에 ..
지난 본문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롬 5:20)고 표현한 바울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되묻는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1절) 죄가 크면 클수록 더 큰 은혜를 누린다면, 우리는 더 큰 죄를 지으러 다녀야 하는가? "그럴 수 없느니라!"(2절) 바울은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기에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다(2절).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3-4절). 이제 우리의 죄악된 본성은 장사되었고, 우리는 죄 안에 더 이상 거하지 않는다. 예수와의 연합된 죽음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으로 이어진다(4절). 나는 침례 받은 순간에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 나의 죄악된 본성은 이미 죽었..
본문에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유사성에 주목하여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는 주장(롬 5:14)을 부연하고 있다. 본문은 이전 본문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이전 본문에 대한 묵상을 참고하여 함께 살펴보길 원한다. 우선 바울은 18-19절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유사성을 문학적 반복으로 표현한다. 한 범죄로 많은 이들이 정죄에 이르렀고 한 의로운 행위로 많은 이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점(18절)과,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들이 죄인이 되었고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들이 의인이 되었다는 점(19절)이다. 지난 본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건대 아담의 범죄로 많은 이들이 정죄를 받게 되었다는 것은, 아담의 후손들이 선조의 죄악 때문에 정죄를 받았다는 의미보다 아담이 최초로 죄..
지난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논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아담, 모세와 비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적 의미를 설명한다. 이 부분은 조직신학의 죄론과 구원론을 따지는 데 중요한 부분이므로 조금 자세히 살펴볼까 한다. 우선 아담은 어떤 존재인가? 죄를 세상에 들여온 존재이다(12절). 그가 죄를 지었기에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고(12절), 이 사망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지배하였다(14절). 이를 죄의 유전 개념으로 쉽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바울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바울이 본문에서 죄의 유전 개념을 옹호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12절). 차라리 14절은 율법과의 관계에서 이해하는 것이 ..
오늘 본문은 어제 본문의 부연 설명을 담당한다. 어제 본문의 주제문은 1-2절로, 칭의를 받은 자들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에 들어가 영광 속에서 즐거움을 누릴 것을 선포한다. 동일한 표현들이 오늘 본문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우선 본문 7-8절은 5-6절에서 이야기하는 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드러났다는 것을 보강한다. 남을 위하여 죽는 것은 쉽지 않다. 설사 의인이나 선인을 위하여 죽는 것이라 해도 그렇다(7절).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8절).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무엇보다 십자가를 통해 가장 확실하게 증명된다. 예수의 죽으심 덕분에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그 결과 심판을 면하게 되었다(9절). 이제..
본문은 칭의의 결과에 대해서 설명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이다(1절).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지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1절). 또한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되었다(2절). 이 모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1절).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는 순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본래 원수였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이 선포된다(롬 5:10, 골 1:21-22). 저주에 빠져있던 우리가 은혜로 옮겨지고, 천박한 우리가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은 우리가 받은 축복이 세상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된다..
바울은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한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믿었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본문의 17절을 읽어야 한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롬 4:16). 이는 그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거라는 예언의 성취였다. 그 예언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였다. 오늘 본문은 이 문장을 부연한다. 아브라함은 그 예언을 믿었다(18절). 하지만 당시 상황은 그 예언의 성취를 "바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18절). 그는 "백..
바울은 할례 여부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칭의를 얻는 복은 할례로 인한 것인가, 아닌가?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9절)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다시 끌고 온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지 않은 시점에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10절). 창세기에 따르면 '칭의' 구절은 창 15:6에 나오는 반면 할례 명령은 창 17:10-11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할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다(11절). 즉 할례가 칭의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칭의의 징표로서 주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 이를 근거로 할례와 세례가 같은 의식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법 하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는 있겠지만.) 따라서 아브라함은 "할례자의 조상"(..
지난 본문에서 율법과 칭의에 대해, 그리고 믿음으로 얻는 의에 대해 논한 바울은, 이제 조상 아브라함을 언급하며 자신의 논지를 보강한다. 아브라함은 "육신으로" 무엇을 얻었는가(1절)? 그가 행위로 얻은 것이 있는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는가? 없다(2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3절) 바울은 아브라함의 경우도 믿음을 통해 칭의를 얻었음을 역설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바울은 동일한 구절을 갈라디아서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언급한다(갈 3:6). 흥미로운 것은 로마서와 반대되는 논지를 펼치는 것으로 종종 인용되는 야고보서에서도 동일한 구절을 언급한다는 것이다(약 2:23). 이 두 컨텍스트를 비교하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수 ..
복음의 요체를 설명한 바울은,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아무런 자랑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역설한다.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 없느니라"(27절) 그 누구도 자신이 착한 사람이어서, 자신이 선한 행동을 해서 의로워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바울의 예상 독자는 유대인으로 보인다. 바울은 복음을 다시 설명하면서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라 하여 무조건 더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칭의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28절). 이 믿음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29-30절). 31절은 이후 로마서 4장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독자들의 반박을 예상하여 그에 대한 답을 하는 부분이다. 믿음이 칭의의 전제 조건이라면, 이제 율법은 "파기"된 것인가..
오늘 본문에는 복음의 요체가 드러난다. 지난 본문까지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없음을 역설한 바울은, 율법 외에 새로운 "의"가 나타났다고 말한다(21절). 이 의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이다(22절). 바울은 여기서 죄와 의의 무차별성을 논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율법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23절). 하지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분 없이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24절). 하나님은 예수를 "화목제물"로 삼아 인간들의 죄를 간과하셨다(25절). 이는 자신이 길이 참으시고 의로우신 분임을 나타내시는 동시에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게 여기심을 보여주는 것이다(26절). 바울이 여기..
이방인들이 심판 앞에 있음을 이야기하고, 유대인들 역시 그 행동에 있어 별반 다르지 않음을 설파한 바울은 유대인 동료들에게 우리 자신을 돌아볼 것을 권면한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9절) 답은 하나 밖에 없다.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누구나 죄 아래에 있다(9절). 바울은 이를 확증하기 위하여 시편 14편을 인용한다(10-12절).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1-3) 그리고 시편 여러 곳에서 표현을 모아와 인간..
본문에서 바울은 스스로 유대인임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할례의 가치에 대해 논증한다. 할례가 중요한가, 율법을 준수하는지 여부가 중요한가? 할례자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율법을 범하면 할례가 무의미해진다(25절). 무할례자가 율법을 행하면 그는 할례 받은 자나 다름 없다(26-27절). 바울은 이에 따라 상당히 급진적인 주장을 한다. 표면적으로 유대인인지 아닌지, 할례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28절).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이다(29절)! 바울은 육체에 행하는 할례는 "율법 조문"에 의한 것이요 "사람에게서" 나오는 칭찬으로 여기고 있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영"에 의한 할례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칭찬이라고 이야기한다(29절). 바울의 이..
지난 본문에 이어 오늘 본문은 율법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선 바울은 17-20절에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을 낱낱이 드러낸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20절).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맹인", "어둠에 있는 자"(19절), "어리석은 자", "어린아이"(20절)를 이끌 자격은 자신들에게밖에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바울은 이들에게 통렬한 꾸짖음을 내린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21절) 바울은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죄인임을 깨닫게 한다. 그들의 말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도둑질하고(21절) 간음하고 우상의 능력을 믿는 ..
바울은 본문에서 "의로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의로움은 무엇인가? 그저 율법을 듣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것이다(13절). 이는 율법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 의로워졌다고 믿는 '선민' 유대인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율법을 아는 사람이 범죄하였다면 그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고, 율법을 모르는 사람이 범죄하였더라도 그 나름 심판을 받을 것이다(12절). 바울은 이 명제가 조금 빈약하다고 느꼈는지 율법을 모르는 사람의 경우를 더 설명한다.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된다(15절). 그들은 율법이 "그 마음에 새"겨져 있으므로(15절)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수 있다(14절). 이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알고 있다는 전제를 그 배경에 깔고 있다. 어..
5절은 지난 본문에서 이어지는 구절이다. 지난 본문에서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사람"(롬 2:1) 역시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이야기했다. 회개를 한다 하여도 그것은 내 공로가 아닌데(롬 2:4), 회개조차 하지 않는다면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5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고집을 피우며 진노를 쌓고 있다(5절).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려고 함정을 파두신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의로우신 분이다(6절). 바울은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는 각 사람"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설명한다.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생"과 더불어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주어질 것이다(7, 10절).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가 임할 것이요, ..
이전 본문까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롬 1:18)의 죄악상을 낱낱이 고발한 바울은, 갑자기 그 포문을 '우리'에게로 돌린다. 아마 로마 교인들은 로마서 1장을 읽으면서 주위의 이교도들을 판단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1절)라니, 이 무슨 날벼락인가?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 올무가 된다고 논한다. 우리는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인지 알지만, 죄악 가운데 있는 자들과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1, 3절). 우리라고 심판을 피하겠는가(3절)? 그들과 같은 일을 행한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이루어질 것이다(2절). 혹시 우리가 회개한다면, 그것 역시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여 회..